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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논이Noni Dec 17. 2021

유령으로 유명한 곳에 그림그리러 가다

게으른 유령이 살고있는 아일랜드의 성에서 1편

5년 전 이맘, 는 프랑스에서 아일랜드로 가는 라이언 에어를 타고 더블린 공항에 내려 아일랜드에 첫 발을 딛는 행운을 얻었어요. 목적지는 맥주로 유명한 킬케니의 샨킬 캐슬. 프랑스에 있을 때 입주 화가 프로그램을 지원, 신청하고, 겨울엔 운영하지 않지만 이번만 특별히 받겠다는 이메일을 받고서 소정의 입주비용을 지불한 뒤(정부 지원금을 받거나 펀딩으로 무료인 곳도 있지만 경쟁률이 치열해 대부분이 약간의 돈을 받아 운영해요. 새로운 환경과 여행을 통해 예술적 영감을 얻는 예술인들에게 안성맞춤 프로그램입니다) 숙소와 작업실 모두 준비된 상태였기에 큰 부담 없이 아일랜드 초행길을 나섰습니다.


버스 안에서 창을 통해 바라본 12월의 더블린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느낌이었어요. 저예산으로 만들었지만 대성공을 거둔(특히 우리나라에서) 음악영화 '원스'의 주무대이자 세계에서 예술가들이 가장 많이 산다는 도시 더블린. U2, 크랜베리스, 데미안 라이스, 코어스 등의 수많은 뮤지션을 배출하고, 켈트족 특유의 소박하면서 감수성 짙은 아름다운 문화를 지닌 아일랜드를 항상 동경해 왔기에 이번 입주 화가 프로그램에 거는 기대가 굉장히 컸습니다.  


2시간가량 몸을 싣던 버스에서 내리자 정류장엔 프로그램 운영자의 오빠인 루븐이 차로 마중 나와 있었어요. 샨킬 성은 정류장에서 가까웠지만 정문에서 성까지의 거리는 꽤 멀었어요. 루븐은 게 성안에서 다 같이 저녁을 먹은 뒤 숙소까지 다시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하며 저녁식사에 초대했어요. 작지만 고즈넉한 성안에 들어가 저녁 만찬이 준비되어 있는 다이닝 룸으로 안내받자 루븐의 아버지인 성의 주인 제프리와 그의 친구 그리고 루븐의 홍콩계 아내인 엘렌이 환영의 인사를 하며 으스러지게 꽉 끌어안고 저의 차가운 볼에 입을 정열적으로 맞추었어요. 처음엔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얼떨떨했지만 그게 아일랜드식의 인사라는 걸 알고 점차 적응해갔답니다.


장작이 운치 있게 타고 있던 벽난로와 오래됐지만 화려한 샹들리에, 고풍스러운 앤티크 장식품들 그리고 벽에 걸린 수많은 초상화에 둘러싸인 거대한 식탁에서 신선하고 새콤한 씨 있는 올리브와 치즈, 호밀빵 등을 애피타이저로 대접받고, 한국인 입맛엔 조금 싱겁지만 맛깔스러운 풍미를 지닌 감자요리와 치킨, 데친 브로콜리, 깍지콩, 뭉근히 삶은 당근 등을 메인으로 레드와인까지 곁들여 감칠 나게 먹었어요.



정통 아이리쉬 디너를 즐기는 사이, 이 성의 실질적 주인이자 제프리의 아내인 화가 '엘리자베스'는 스코틀랜드에 있는 딸을 만나러 출타 중이었기에 며칠간 자리를 비운 상태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곳곳에 걸린 그녀의 다채로운 색감과 천재적인 구도의 매력적인 추상화들이 그녀가 보통 예술인이 아니라는 걸 증명했고, 나는 어서 엘리자베스를 만나길 학수고대했어요. 별 사전 정보 없이 그저 아일랜드 시골에 그림 작업하러 온 것뿐인데 이런 거장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다니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Elizabeth at work on one of her paintings.


식사를 마치고 제프리는 이 성에 살던 귀족의 초상화를 가리키며 이 사람의 유령이 아직도 나타난다는 아주 흥미진진한(한국 처녀귀신은 무서워서 싫지만 유럽 유령은 안 무섭고 재밌어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름은 피터, 종종 사람들 앞에 출몰해 간을 떨어지게 만들지만 해를 끼치진 않는다는 이야기에 바로 수긍이 갔어요. 왜냐면 초상화에 그려진 피터의 얼굴은 순박하고 약간 게을러 보이면서 만사 귀찮아하는 표정이었기 때문이었죠. 공포영화처럼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만드는 열정 따윈 없어 보이는 관상이었어요. 귀차니즘의 창시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되어 성격이 바뀔 것 같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제프의 가족들이 수십 년 전 이 성을 매입해 전직 귀족인 피터라는 이름의 귀신과 함께 지금까지 잘 살아온 거라 믿어요.


https://www.spookyisles.com/shankill-castle/



배불리 근사한 만찬얻어 먹었겠다, 유령 이야기도 들었겠다, 너무나도 만족스러운 아일랜드에서의 첫날이었습니다. 성에서 백 미터가량 떨어진 나의 숙소 겸 작업실이 있는 150년도 넘은 우아한 오두막에 들어와 짐을 대충 풀고 씻고서 침대에 몸을 뉘었어요. 침실은 이층에 있었고, 계단이 놓인 복층 구조의 오두막으로 아래층엔 거실, 작업실, 부엌, 욕실이 있었어요. 장거리 여행으로 피로가 몰려와 눈을 감고 선잠이 들었을 무렵, 누군가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벅저벅.


눈이 번쩍 뜨이고 온몸의 털이 섰어요. 분명 문을 잠갔기에 누가 이 집에 들어올 리가 없었어요. 그래서 더 무서웠어요. 계단 오르는 소리는 들리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계속해서 다른 작은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헉! 이게 바로 유령 피터의 출몰?'






다음 편에 계속-


P.S - 안타깝게도 그당시 쓰던 스마트폰이 1년 후 갑자기 망가진 바람에 천장이 넘는 유럽에서 찍은 사진을 몽땅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카메라는 스코틀랜드에서 렌즈가 부서졌고, 스마트폰과 클라우드를 동기화 하지 않은 탓에 이메일에 보낸 사진 몇 장밖에 남아있지 않아 여전히 가슴 아프지만 웹상에 샨킬성의 사진이 많아 다행입니다. 언젠가 아일랜드에 꼭 다시 한번 가보고 싶어요. 그땐 여름에 좋은 동행과 함께 가고싶네요.


위의 사진들 출처 : https://www.independent.ie/life/home-garden/this-castle-which-will-soon-open-a-new-cafe-is-full-of-this-artists-eclectic-paintings-36729488.html


성 지하 부엌 한켠에 자리한 장식장  
택배안에 들어있던 박스 판대기를 재활용하여 그림.
펜드로잉으로 완성한 아일랜드식 부엌 장식장. 재활용 종이위에 펜. 노니 그림

노니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nonichoiart/



킬캐슬 인스타그램

https://instagram.com/shankillcastle?utm_medium=copy_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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