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리옹에서 아일랜드 킬케니까지 반나절 남짓한 시간의 여행으로 피로한 몸에, 밤새도록 들려오던 이상한 소음(계단 올라오는 소리, 부스럭대는 소리)과 그로 인한 악몽으로 가위까지 눌려저의 아침 컨디션은 바닥을 기다 못해 땅 밑으로 파고 들어가고 있었어요.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아일랜드에서의 첫 밤이 이렇게 시작되다니...!
일어나자마자 운영자(성주인 내외의 딸 포비-더블린 거주) 에게 이메일을 보내 간밤에 일어난 일에 대해 상세히 고하고 여기에서 계속 자기 무섭다는 이야기도 덧붙였습니다. 잠을 제대로 못 자 엉망인 얼굴을 씻고 양치를 하자 루븐이 오두막 현관을 두드렸어요. 괜찮냐며 묻는 그에게 여기 유령이 있는 것 같다고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하소연하자 루븐은 황당한 얼굴로 눈을 껌뻑이더니 틀림없이 생쥐일 거라며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포비와 상의 끝에 저를 당분간 성안의 게스트룸에서 재우겠다는 말에 단순한 전 입꼬리가 귀까지 걸렸고 그 길로 바로 짐을루븐의 차에 실은 뒤 성안으로 하룻밤만에 다시 입성했어요.
성안에서 며칠간 머문 방
밖에서 보면 아담하고 장난감 집 같아 보이지만 40여 개의 방이 있는 샨킬성의 2층에 자리한 커다랗고 아름다운 방으로 안내를 받고 신이 나 짐을 풀었어요. 성에 들어와서 지내보다니 이게 웬 행운인가요! 엘리자베스가 그린 수많은 그림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고풍스럽고 우아한 방에 배정받아 기분이 한없이 들뜨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그 방은 포비가 쓰던 방이었으나 그녀가 독립한 후로는 에어비앤비로 돌려 손님들을 위한 방으로 쓰인다고해요. 이 아름다운 방에 있으니 오두막(숙소)에서 지내던 하녀가 순식간에 공주가 되어 신분 상승한 듯 콩닥콩닥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성안에서 지내보기는 난생처음이었기에 마치 꿈결 속에서 프릴과 레이스가 잔뜩 달린 드레스를 입고 왈츠라도 추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샤라라~
연필과 색연필로 그리기 시작한 샨킬캐슬
눈이 불편한 분들을 위해 안전하게 만들었다는 유럽식 아거 오븐위에서 저녁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수 많은 엔티크 장식들과 식기들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그림으로 꾸며진 지하 게스트용 부엌입니다. 눈과 입이 동시에 즐거웠습니다.
낮에는 작업실이 있는 오두막에서 그림을 그리고, 제프리가 슈퍼마켓까지 차로 데려다줘 식료품들을 구입한 뒤 지하에 있는 게스트용 부엌에서 저녁을 지어먹으니 하루 일과가 끝나 드디어 공주방에서 우아하게 잘 시간이 왔습니다.
12월의 아일랜드는 우리나라의 시베리아 한파까지는 아니지만 이가 닥닥 부딪힐 정도로 추웠고, 옛날에 지어진 돌집인 샨킬 성안의 히팅 시스템은 열효율이 낮아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에 어깨가 절로 움츠려들 정도로 으슬으슬했어요.
침대에 있는 전기장판을 켜고, 작은 이동식 레디 에이터를 침대 바로 옆까지 끌어당겨 잤지만 이불밖에 내놓은 얼굴은 냉장고에 며칠 둔 고깃덩이처럼 차가워졌고, 숨을 내쉬면 입김이 허옇게 뿜어져 나왔습니다. 추위에 오들오들 떨다 보니 이 성이 유령 출몰지라는 사실도 까맣게 잊은 채 그저 몸을 따뜻하게 만들려 안간힘을 다했어요. 유령마저 짜증을 내며 도망갈 법한 추위였습니다.
냉동고기 창고 같은얼음공주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자 유럽의 성에 대한 모든 환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말았어요. 역시 한국인은 온돌 방위에서 뜨끈뜨끈하게 허리 지지며 자야 하는 건가요. 입김 나는 공주방에서 옷 갈아입을 땐 추위로 소름이 돋아 온몸이 닭살로 뒤덮였고, 이글루만큼이나 추운 욕실에서 샤워할 땐 뜨거운 물이 잘 나오지 않아 찬물로 씻었어요. 샤워 전 뜨거운 물탱크의 버튼을 눌러야 했었는데 제대로 숙지 못한 제 불찰이었죠.
며칠간의 얼음공주 체험 도중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성 안주인, 화가 엘리자베스가 스코틀랜드에서 돌아왔어요. 여성스럽고 온화하며 나긋나긋한 말투로 항상 예쁘게 말을 하는 남편 제프리와는 달리 그녀는 세상을 호령하는 대장부 같은 면모를 지닌 호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60대 여성이었어요. 가식이라고는 1%도 없는 성격에 머리 검은 이방인을 어떻게든 도우려 애쓰던 정 많은 엘리자베스에게 저는 큰 호감을 느꼈고, 함께 소를 드로잉 하러 가자던지, 친구 집에 저녁 초대받았다며 같이 가자고 제안할 때엔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저를 마치 베이비시터가 어린아이 돌보듯 하셨어요.
아름다운 샨킬 성에 해가 비칩니다.
한 번은 저와 함께 무언가를 사러 시내에 가는데 갑자기 장례식에 갈 일이 있다며 굉장히 큰 교회 앞에 차를 멈춘 적이 있었어요. 당시 빨간색 코트를 입고 있었던 저는 옷차림이 경우에 맞지 않아 그냥 차 안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자 아일랜드에선 장례식에서 검정 옷 입지 않아도 된다며(쿨하죠!) 제 손을 잡아끌었고 우린 같이 교회 안으로 입장했습니다. 돌아가신 분은 엘리자베스의 지인으로 생전에 경찰 간부였고 은퇴 후 지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대형 아일랜드 국기로 감싼 관을 옮기는 분들이 모두 경찰이었고, 거대하고 엄숙한 교회 내부는 장례식에 참석한 수많은 경찰들, 일가친척들과 지인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죠.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검은색 옷을 입지 않았기에 편한 마음으로 알지도 못하는 분의 명복을 빌어드릴 수 있었습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애도를 표하고 나오는 교회 출구에서 경찰복을 입으신 중년 남성이 눈에 확 띄었어요. 할렐루야! 중년 꽃미남의 아이콘 브래드 피트나 조지 클루니보다 훨씬 더 잘 생긴 얼굴이었습니다. 속으로 '와! 되게 잘생기셨다!' 하고는 교회 밖으로 나오고 있는데 (꽃미남에 열광하던 엄마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아일랜드 미남을 발견하고 보니 그 순간 눈이 쨍하고맑아지는 느낌이었어요), 출구로 나오며 뒤를 돌아보니 엘리자베스가 그 잘생긴 경찰 아저씨를 붙잡고 대화를 하고 있었어요. 무슨 대화인지 들어보니
"오우!! 유아 쏘 핸썸! 갓 블레쓰 유!"
순간 푸핫 하고 뿜을 뻔했어요. 장례식장에서 무례하게 웃을 수 없어 입술을 깨물며 얼굴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너무 웃겨서 속으로 미친 듯이 웃었어요. 그 경찰 아저씨는 황당한 얼굴로 살짝 미소를 띠며 땡큐라고 짧게 답했고 엘리자베스는 계속해서 그에게 "너무 잘생겼다 ♡♡" 하고는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를 떴답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사람 보는 눈은 다 같나 봅니다. 그런데 꽃미남에 대놓고 열광하고 축복하는 여인은 처음이었어요(돌아가신 우리 엄마 이후로). 엘리자베스는 꽃미남뿐만 아니라 전자제품 가게 점원에게도 참 친절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제 그림을 보시고는 요즘 예술한다는 사람들 거의 다 예술하는 척하는데 너야말로 진짜 예술한다며 진정한 아티스트라고 치켜세워 주기도 하셨어요. 아일랜드의 보물 같은 예술가인 60대 거장에게서 그런 덕담을 듣고 30대 아마추어 화가의 가슴이 얼마나 벅차올랐을지는 독자님들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자신이 보고 느낀 대로 주저 없이 표현하는 엘리자베스의 솔직하고 담대한 표현력은 보는 저로 하여금 늘 웃음을 유발했고 60대에도 저렇게 유쾌하고 천진난만한 성격을 지닐 수 있다는 것에 안심이 되었습니다. 왜냐면 저도 그렇게 순수하게 나이 들어가고 싶으니까요. 남이 보면 철없어 보이고 주책맞아 보일 수도 있는 중년 이후의 천진난만함이 나는 좋아요. 왜 나이 들면 꼭 중후해야 하고 점잖아야 하나요?
꾸밈없이 그저 해맑게, 생긴 대로 살아가고 싶어요.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서. 나는 남의 마음에 들려고 세상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내 마음에 충실하고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고 싶어요.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낯선 꽃미남을 열정적으로 축복하던 엘리자베스는 남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는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암을 이겨내고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게 아닐까요? 암 선고를 받고 죽을 날을 기다리며 파란색 관을 짜두었지만 얼마 안가 암투병을 딛고 일어난 그녀에게 더 이상 관은 필요 없게 되어 샨킬 성 할로윈 축제 이벤트에 중요한 소품으로 쓰인다고 합니다(엘리자베스가 관에 들어가 있다가 아이들이 지나가면 관 뚜껑 열고 나온대요! 이 얘기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아마도 그녀의 거침없이 밝고 순수한 마음이 암세포들을 물리쳤나 봅니다. 최고의 항암제는 희망과 웃음이니까요.
♡희망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제가 직접 그린 나비 그림들을 소개합니다.
희망을 상징하는 나비의 날개에 꽃을 그렸어요. 챠크라로즈 부분. 캔버스위에 아크릴. 노니 그림 2019. SOLD
처음으로 시도한 꽃나비입니다. 종이 위에 수채. 노니 그림 2014
두번째 챠크라. 종이 위에 수채. 노니 그림 2019
작약 위에 앉은 푸른 나비. 종이 위에 잉크와 수채. 노니 그림 2016
챠크라 로즈. 캔버스위에 아크릴. 노니 그림 2019. SOLD
Inner peace. 내안의 평온. 샨킬성에서 밑그림을 마쳤습니다. 종이 위에 수채. 노니 그림 2017- 2019
호랑나비도 수국 위에 앉자마자 꽃나비가 되었습니다. 샨킬성에서 밑그림 완성한 그림입니다. 종이 위에 수채. 노니 그림 2017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일랜드 이야기는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
P.S - 엘리자베스와 제프리 부부는 저를 위해 오두막 숙소에서 하룻밤을 지내본 뒤 유령은 절대 없으니 안심하라고 했지만 생쥐 소릴 들었다며 턱시도 시골 고양이'미스터 티들스'를 오두막에 들여놨고,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온 저는 그 계단 올라오는 소리의 출처를 알게 되었어요. 바로 오두막 바로 옆에 있던 또 다른 오두막에 살던 프랑스인 정원사의 소리였습니다. 벽을 하나 두고 두 집이 붙어있어 작은 소리도 고스란히 전해진 것이었지요. 그녀는 제가 입주한 그날 밤 짐을 챙겨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기 위해 새벽에 프랑스로 떠나며 부스럭대는 잡음과 계단 오르는 소리를 낸 것이었어요. 역시 게으른 유령 피터는 성에서 오두막까지 오기엔 너무 귀찮았나 봅니다. 그날 이후 저는 따뜻한 오두막에서 잘 먹고 그림 그리며 잘 지냈어요. 냉동고에서 떨며 얼음공주로 살기보다는 따뜻한 오두막 하녀로 사는 게 더 행복했답니다 :)
아일랜드의 샨킬 캐슬. 작은 종이 위에 수채색연필(물없이). 노니 그림
뒷정원에서 보이는 샨킬캐슬 외곽
하늘에서 내려다본 샨킬캐슬 전경. 사진출처 : airbnb
머물던 오두막 부엌 한켠에 자리한 식기 장식장.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부엌 풍경입니다.
♡코로나 시대가 끝나면 유령이 나오는 샨킬캐슬에 들러보세요. 신비롭고 아름다운 아일랜드 여행은 순수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거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