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논이Noni Jan 21. 2022

제주 한달살이, 말끔히 청소하고 퇴실하자 생긴 일

에어비앤비 사장님이 보내주신 선물과 편지

지난 10월, 영국에서 귀국을 준비하며 에어비앤비 사이트로 제주도에서 한 달 동안 머물 숙소를 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해외에서 떠돌며 십 년을 살았지만 제주도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기에 어느 지역이 내게 맞을지, 어떤 숙소를 구해야 할지 몰라 망설일 때 어느 아담한 집이 눈에 들어왔어요. 후기를 보니 겨울에도 집이 따뜻해서 땀 흘리며 잤고, 침구와 식기들도 깨끗했다는 누군가의 글이 나쁘지 않아 호스트에게 쪽지를 보내 혹시 근처에 도서관이 있는지 여쭙자 도보로 40분 거리에 있다는 답장이 왔습니다. 걷는 걸 즐기고 운전면허가 없는 제게 40분 걷기는 식은 죽 먹기라 마지막 결정을 고려하고 있을 때 호스트로부터 온 '특가 찬스' 알림이 울렸습니다. 24시간 안에 숙박 예약을 하면 할인된 가격에 묵을 수 있다는 절호의 기회였어요. 예약을 서두르고 제주도행 비행기표를 사고 나자 모든 일이 착착 진행되었습니다.


해외 접종자인지라 자가격리 면제서를 신청하고 받아 3년 만에 귀국을 하고, 아버지가 계신 곳에 머물며 관할 보건소에서 눈물 나는 두 번의 PCR 검사를 한 뒤 음성 판정을 받고, 길고 긴 능동 자가격리를 마친 후 드디어 제주도 땅을 밟았습니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훅 풍겨온 따뜻하고 습한 기운에 기분이 좋아지고, 이국의 향기가 물씬 나는 야자나무를 보자 가슴 안에서 얕은 파도가 쳤습니다. 난생처음 느껴본 제주의 햇살은 감귤빛으로 반짝이며 두 뺨을 간지럽혔어요.


'오길 잘했다, 제주도에.'



제주도에 온 이유 중 가장 큰 하나는 바로 날씨였습니다. 한국의 시베리아 한파를 못 견뎌 비교적 온화한 겨울을 보낼 수 있는 외국에서 고생하며 살아도 행복했던 수족냉증 환자였기에 제주의 따뜻한 날씨는 제게 구세주와도 같았죠. 좋은 음식만 먹으려 노력하고 운동을 매일 하니 손발이 많이 따뜻해졌지만 추운 건 여전히 몸서리쳐지네요.


게다가 맛도 좋고 이름도 예쁜 . 다른 예쁜 말로 밀감, 감귤의 천국에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어요. 귤 열개 아니 스무 개도 한 번에 해치울 수 있는 귤에 미친 인간이 왜 제주도에 한 번도 못 와본 건지 그것이 알고 싶네요.


또 다른 이유는 사람이 적어서였어요. 서울보다 네 배나 큰 땅에 69만 명이 산다면 거리를 걸으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지 않아도 될 것 같았죠. '도를 아십니까'의 주요 타겟이 되기 십상인 만만해 보이는 얼굴을 가진 저는 번화가인 강남 같은 곳만 가면 어김없이 그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어요(다행히 따라가거나 돈을 뜯기진 않았지만). 서울에서 태어나 20년을 살았지만 그 인구밀도에 아직도 적응을 못했는지 사람 많은 마트에 갈 일이 있기라도 하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하고 집에 오면 시든 대파처럼 기진맥진한 몸을 가누기 힘든 약한 기의 소유자인 제게 인구밀도 낮은 제주도, 특히 서귀포는 제게 선물 같은 땅입니다.

표선 돌하르방

또 바다와 한라산이 어우러져 만드는 그림 같은 경관과 한겨울에도 여기저기에 피어있는 수많은 꽃들은 자연치유의 힘을 믿는 제게 무엇보다 절실했던 터라 제주도에서 반드시 살아보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제주도 한달살이가 일 년 살이로 이어졌고 지금은 서귀포에서 원룸을 구해 살고 있지만 표선에서 한 달 동안 지냈던 늦가을의 그 시간들이 그리워집니다.


한달살이 하며 제일 좋았던 건 밀감 밭 뷰를 원 없이 감상한 것이었어요. 백팔배와 명상을 마치고 창밖을 내다보면 파란 하늘 아래 밀감 밭이 그림처럼 펼쳐진 풍경이 눈과 영혼을 쉬게 해 주었습니다. 귤밭만 보면 행복해지고 마음이 치유되는 기분이었어요. 귤나무들이 꼭 저를 지켜주는 것만 같아 감사했습니다.


늘 평화롭지만은 않았어요. 어느 아침, 현관문을 열고 나와 여느 때처럼 마당에서 햇볕 받으며 귤밭 구경하는데 뭔가가 스르르 움직이는 느낌에 쳐다보니 돌담 앞에서 뱀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뱀은 티브이나 동물원에서 본 뱀이 다 였기에 살아있는 야생뱀을 처음 본 순간 큰 충격을 받았고 내가 잘못 본건가 이게 정말 뱀인가 의문이 들어 가까이 다가가자 뱀은 물결치듯 몸을 움직이며 돌담 구멍으로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큰일 날뻔했지, 운이 좋았죠. 그 길고 큰 뱀한테 물려 비명횡사하거나 병원신세 지는 일없이 무사해 얼마나 다행인지.. 굉장히 무서웠지만 아무 피해 없이, 흔치 않은 제주도의 야생 초록색 뱀을 바로 눈앞에서 구경할 수 있었던 건 진귀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날의 사건으로 사장님은 뱀을 쫓는 방역을 즉각 실시하셨고 뱀이 싫어한다는 하얀 가루를 온 마당 곳곳에 뿌리셨어요. 살짝 뱀한테 미안해졌어요. 사람에게 해도 끼치지 않고 그저 도망갔을 뿐인데 독한 가루를 사방에 뿌려댔으니 뱀의 입장에선 기분 나쁠 일이죠. 그렇지만 사장님께는 어린아이가 있어 행여라도 아이가 뱀에 물리면 큰일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표선 도서관에서 새로 포장한 도로를 타고 십분 정도 걸어가면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보이는데 그 해안선을 따라 해비치 해변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잔잔하고 고요합니다. 끊임없이 파도치는 내 마음속을 바라보기라도 하듯 표선 앞바다를 하염없이 보고 있으면 마음이 곧 차분해졌어요. 가는 파도에 슬프고 부정적인 마음을 모두 던져 잊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해비치 해변은 이름처럼 해가 비치기라도 하면 환상적인 푸른색으로 신비롭게 빛나는 바닷가예요. 제가 본 바닷가 중 가장 예뻐서 언젠가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랍니다. 살면서 제주도에 한 번도 온 적 없고 표선이라는 지명도 처음 들어본 제가 이곳을 알게 되어 행운이었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 바닷가에 올 수 있어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어느새 한 달이 지나 체크아웃할 날이 다가왔고, 그날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청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침대 시트와 베개, 이불 커버를 벗기고, 부엌 정리를 했어요. 욕실 청소는 틈나는 대로 해서 할 건 없었지만 수채 구멍의 머리카락은 제거해야 했죠. 심하게 많은 머리숱의 소유자이기에 빠진 머리카락은 늘 눈에 띈답니다. 두껍고 구불거리는 곱슬머리라 더욱 민폐고요. 빠진 머리카락들이 그 초록뱀처럼 어딘가로 스르륵 알아서 가주면 좋으련만.


매일 밤 씻고 자기 전에 방바닥 걸레질을 하는 게 습관이라 한달살이를 하면서도 늘 그래 왔기에 특별히 깔끔 떨며 청소를 하진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체크아웃하고 몇 시간 뒤 문자가 왔어요. 사장님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도착한 친환경 귤과 편지..

감동이었어요. 친환경 귤 한 박스라니! 게다가 정성 들여 쓴 손글씨까지..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서비스로 딱 한번 마주치고 문자로만 대화했던 터라 더 감동이었어요.


그렇게 사장님께 택배로 받아본 귤은 제가 먹어 본 귤 중 가장 맛있었고, 친환경 귤이라 그런지 혀뿐만 아니라 몸속에서도 행복하다고 외치는 것 같았어요. 마트에서 사 먹는 귤과는 사뭇 다른 맛이었습니다. 따사로운 제주 햇살 받으며 농약 없이 건강하게 자라온 귤답게 진하면서 깊은 귤 본연의 맛이 혀끝까지 전해졌어요.


십 대 시절, 귤을 너무 좋아해 귤 농장으로 시집가고 싶어 했던 꿈을 잠시 꾼 적이 있었어요(징하게 꿈이 많았습니다). 커서는 스페인에서 오렌지 농장을 하는 집의 아들과 연애하고 싶었고요. 이젠 내 힘으로 지은 집에 직접 귤나무를 심고 정성 들여 키우며 살고 싶어요. 그날이 오면 사장님 댁으로 제가 키운 귤을 보내드려야겠습니다.


과일과 연관된 글이라 제가 지금까지 그린 과일 그림들을 올려봅니다.

작은 종이 위에 수채. 아팠을때 저를 위로해준 친구들입니다. 과일처럼 상큼한 친구에게 선물했어요. 노니 그림 2021.
종이 위에 수채, 오일파스텔. 아주 오래전에 동화공모전에 냈다가 낙방했던 그림이지만 영국에서 전시하고 운좋게 판매완료되었습니다. 노니 그림 2002.
종이 위에 수채. 영국 식물화 협회 디플로마 과정 과제였습니다. 과일을 사와서 보며 그리는데 반으로 가른 배가 먹고 싶어 침흘리면서 그린 기억이 나네요. 노니 그림 2014

종이 위에 수채. 식물화 디플로마 과정 마지막 작품. 제가 직접 길렀던 유기농 딸기를 그렸어요. 잘 보면 사마귀도 보입니다. 사마귀가 딸기 줄기 위에 붙어 앉아 쉬는 모습이 평화로워 보이죠? 노니 그림 2016

딸기 씨 그리기는 고행이었습니다.
종이 위에 수채. 아크릴. 뉴질랜드에서 직접 산 체리를 보고 그린 그림입니다. 역시 침을 줄줄 흘리며 작업했던 기억만 납니다 ㅎㅎ 노니그림 2007.
종이 위에 수채. 아크릴. 블루베리와 살구를 얹은(계란노른자 아님) 케이크와 동화작업을 위해 그린 딸기 케이크입니다. 노니 그림 2005, 2011
과일을 얹은 sweet pancakes. 종이 위에 수채. 노니 그림 2021
종이 위에 수채, 아크릴. 컵케이크 마을입니다. 노니 그림 2012
법환동 양양이와 감나무, 그리고 참새. 종이 위에 수채. 노니 그림 2021
그림그리던 한때. 저 뒤에 귤그림도 있습니다. 가끔 나오는 망작이죠.



*층간소음 그 후의 이야기를 전할게요. 새해 첫날 직접 쓴 카드와 함께 사과를 사서 위층 선생님께 전해드리고 집에 왔는데 잠시 후 벨이 울려 나가 보니 위층 선생님께서 연갈색 물 한 병을 들고 서 계셨어요. 헛개나무 달인 물인데 몸에 좋다며 마셔보라고 하시며 제게 안겨주셨습니다. 카드 읽고 감동받으셨고, 소리 때문에 미안해서 그리고 '딸 같아서'라는 말씀도 덧붙이셨어요. 따님이 스물일곱 살이시래요. (저는 중년입니다만.. 마기꾼이기도 합니다) 덕분에 몸에 좋은 헛개수도 처음으로 마셔보고 감사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경솔하고 예민했던 제가 반성 많이 하고 조금이나마 성숙해진 계기가 되어 감사한 연말이었답니다. 좋은 이웃사촌도 생겨서 행복합니다.

사과와 카드 그리고 헛개수

지난 이야기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신 여러분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인스타그램으로 직접 와주셔서 격려와 응원주신 많은 분들께도 감사 말씀 전합니다. 행복하세요♡


*더 많은 그림 보러오세요~

https://www.instagram.com/nonichoiart/

 

제주도의 푸른밤을 연상케하는 푸른빛이 도는 그림들 모음입니다. 수채화, 유채화, 펜화, 색연필화, 아크릴화. 모두 노니 그림 2006-2021




모두 수채화로 그린 꽃그림들입니다. 노니 그림.




꽃도 좋아하고 나비도 좋아해서 자주 그려요. 노니 그림.




한때 만화를 했던 적이 있어 판타지 아트를 지향합니다. 신비한 존재와 동물, 요정을 좋아해요. 별이 빛나는 밤하늘은 필수입니다.




유화로 그린 브로닌이 사랑하는 것들. 현재 뉴질랜드 브로닌의 집에 걸려 있습니다. 노니 그림 2020






긴 글과 그림 읽어주시고 감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다가 보이는 제주의 그림 같은 집 그리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