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를 시작한 지도 어느덧넉 달째에 접어듭니다. 우리나라이면서 우리나라 같지 않은 이곳 제주에서 요즘 산책을 하고, 장 보러 가는 길에 눈에 자주 띄는 꽃들이 있어요. 선명한 분홍빛이나 진한 딸기우유 색깔 또는 흰색+빨간색 조합으로 진초록 잎 무성한 나무에 붙어 보색 대비를 일으키는 덕분에 더욱 아름다운 겨울꽃 동백.
한겨울, 모진 바닷바람을 뚫고 피어나 눈, 비바람, 우박 맞고 갖은 고생하며 며칠 화려하게 피어있다 땅으로 툭 떨어지고 마는 동백의 짧고 굵은 삶이 애처롭다기 보단 너무나 멋져 보입니다. 적어도 누군가(꽃에 미친 저 같은 사람)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가니까요.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일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 말한 위대한 쇼맨 바넘의 말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동백은 눈으로만 저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 게 아니었어요. 동백나무가 많이 심어진 산책로에서 저물어가는 이 두 꽃을 발견했을 때 그 곱고 우아한 자태를 그림으로 그려보리라 다짐하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러다 꽃술 밑으로 웬 투명한 액체가 고여있는 것을 보고는
'이슬인가? 아침도 아닌데.. 한낮에 웬 이슬이 맺혀있지?'
의아해하던 찰나 그 물질의 정체는 꿀이 틀림없을 거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 (형제들이 지은 나의 옛 별명 : 곰녀) 본능적으로 검지 손가락을 가만히 뻗어 투명하고 끈적이는 액체를 손끝에 조심스레 묻히고는 혀끝으로 가져가 맛을 봤어요.
세상에 이런 맛이!
제주의 자연이 선물한 오가닉 동백꽃 꿀의 달콤한 맛은 저를 잠시 천국으로 데려다주었어요. 마치 굶주리던 곰이 벌집을 발견한 듯 작게 환호성을 지르고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달디 단 동백꽃 꿀 한 방울에 기분이 한층 업되어 어디 다른 꿀 또 없나? 눈에 불을 켜다가 곧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안되지. 이건 새들 먹이일 텐데. 이쯤에서 그만 멈추자.'
누구보다 식탐 쩌는 인간이지만 못내 아쉬운 마음을 접고 새들을 위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투명하고 영롱한 꿀이 맺혀있던 동백꽃
스물여섯 살의 제가 영국에 머물 때, 공원 가로수에 열린버찌, 언덕 위의 덤불에서 익은 블랙베리, 야생 라즈베리 같은 열매들을 자주 따먹은 적 있었어요. 맛도 좋고, 무료라는 사실에 신이 나서 먹어댔지만 신기하게도 많은 영국인들은 그 맛난 천연 유기농 과일들을 그냥 지나치고 손도 대지 않는 게 아니겠어요? 당시 머물던하숙집 주인 할머니께 왜 사람들은 그 맛있는 걸 안 먹고 그냥 내버려 두는지 궁금하다고 하자 야생동물들을 위해서 손대지 않는 거라고 말씀해주셨어요. 그 순간 부끄러움에 제 얼굴은 라즈베리만큼이나 벌게졌답니다. 물론 따서 잼을 만드는 분들도 있지만 동물들의 몫은 남겨두는 모양이었어요. 마치 늦가을 감나무에 까치를 위한 감 한두 개를 남겨 두는 우리나라의 인정과 비슷해서 정겨워요.
작은 종이 위에 수채. 노니 그림 2022. 이 그림에는 작은 비밀이 있습니다. 눈 좋은 분들은 보일거예요:)
저처럼 동백꽃의 꿀을 좋아해 이름이 동백새였다가 동박새로 바뀐 연둣빛 새도 제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새입니다. 언젠가 귤밭 옆을 지나다 돌담을 사이에 두고 귤나무에 앉아 있는 연두색 새를 우연히 발견하고는 심장에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눈 언저리는 하얗게 빛나고, 작고 여린 몸을 선명하고 청초한 연두색 깃털로 감싼, 마치 그림 같은 새의 예쁜 모습에 숨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어요. 귤나무 여기저기를 한시도 쉬지 않고 왔다 갔다 하며 어찌나 바쁘시던지요. 그 예쁜 연둣빛이 눈앞에 아른거려 무슨 새일까 궁금해 '제주도 연두색 새'를 검색해보니 동박새라고 하네요. 외국에서는 A silver eye 나 White eye 라고도 불린답니다.
귤도 잘 먹고 동백꽃도 좋아해서 그렇게 예쁜 건가요? 같은 음식을 먹어도 저는 동박새처럼 예뻐질 수 없다는 사실에 살짝 슬퍼집니다만 그냥 생긴 대로 살겠습니다.
동박새를 완성했습니다. 이제 귤을 그릴 차례!
조화같은 동백꽃.
어느 음식점 옆을 지나는 길이었어요. 동백나무가 담처럼 빽빽하게 심어져 있고 꽃망울을 하나둘 터뜨리는데 그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예쁘면서 활짝 핀 이 줄무늬 동백에 찬양을 퍼붓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이야~ 너는 어쩜 이렇게 예쁘니? 정말 최고다!"
그런데 이 아이와 비슷한 무언가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어요. 어릴 적 제사, 차례상에 올렸던 그 할머니 사탕! 이름이 '옥춘당'이었을 거예요. 이름마저 구수한 옛 사탕... 이가 없으셨던 외할머니가 오물오물 즐겨 잡수시던 그 커다란 사탕은 이 동백꽃과 왜 이리도 이미지가 비슷한가요? 그래서 더 정겹고 단내 나는 동백꽃입니다.
출처:나무위키. 찾아보니 이름이 옥춘당이 맞군요.
옥춘당 닮은 달콤한 동백 그리기. 밑그림없이 붓으로 바로 그리기 시작해 두시간동안 줄무늬와 즐거운 씨름을 했어요.
줄무늬 동백꽃. 작은 종이 위에 수채. 노니 그림 2022
가수 이미자 님의 옛 노래를 즐겨 부르시던 어머니의 예스러운 취향 덕분에 어린 시절의 저는 처음 동백이란 꽃 이름을 노래로 접했어요. 간드러진 기교로 우는 듯 서글피 노래하는 전통가요 동백아가씨의 가사는 상사병에 얼굴이 빨갛게 멍들어 버렸다는 노랫말이 신기했지만, 너무 미련 떠는 사랑노래로 들렸기에 시대에 동떨어진다 생각해 어린 제게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어요. 또 당시 트로트라면 질색하며 무조건 거부감을 느꼈기에 동백꽃은 동백아가씨라는 노래 하나만으로 제게 관심 밖의 꽃이었어요. 머리에 기름이 늘 왕성한 제겐 전혀 필요 없는 동백기름도 한몫했지요.
그래도 이미자 님을 좋아하시는 엄마를 위해 음반도 사다 드리고,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안내원 알바를 할 때 무대 뒤에서 이미자 님을 직접 뵙고 용기를 무릅쓰고 간신히 싸인을 받아 드리기도 했어요. 엄마는 '뭐하러 이런 걸 사와? 뭔 돈이 있어서' 하시거나 '굽신거리면서 싸인 같은걸 받긴 왜 받아?' 하시며 퉁명스러운 피드백으로 일관하셨지만 속으로는 좋아하셨다는 걸 이젠 알아요.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신 엄마가 한때 그토록 살고 싶어 하셨던 제주도에서 1년살이를 시작하고, 삶에 지친 날엔 설탕 탄 막걸리 한잔 옆에 두시고 목청껏 부르시던 동백아가씨를 매일 길에서 만나다 보니 꼭 곁에 엄마가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애달프지만 행복합니다.
딸기를 듬뿍 넣고 갈아만든 딸기우유같은 색깔의 동백꽃에 반했어요♡
시드는 순간도 예쁘죠?
누군가 동백을 꺾어 화단에 두었네요. 길바닥에도 동백 한송이가 나뒹굽니다.
흐드러지게 핀 동백
데일리드로잉으로 연필 밑그림없이 붓으로 단시간안에 그려 본 동백입니다.
느릿느릿 밑그림을 정성들여 그린 뒤 수채화지에 선을 따고 일주일 넘도록 채색중인 동백꽃입니다.
드디어 두송이째. 시간은 오래 걸리고 눈은 살짝 아프지만 느리게 그리면 꽃을 더 잘 알게 되고 그리면서 행복을 느껴요. 다 그리고 나서 커다란 보람을 느끼는 건 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