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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논이Noni Sep 10. 2020

꽃을 사랑한 여인, 꽃에 미친 화가를 낳다

꽃사랑 유전자를 물려받은 꽃에 미친 화가의 꽃 이야기


오래전 엄마 아무 생각 없이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엄만 세상에서 무슨 무늬가 제일 좋아?"

"당연히 꽃무늬지! 누가 뭐래도 꽃무늬가 최고야."

"그렇지? 나도 꽃무늬야. 우린 취향이 어쩜 이렇게 똑같지?"

"취향만 똑같냐? 생긴 것도 똑같지."


꽃무늬가 세상 최고의 무늬라는 걸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는 듯 엄마의 대답은 확고했다. 유난히 꽃사랑이 별나던 엄마의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그때 난 왜 물어본 걸까? 엄마와 웃으며 주고받던 소소한 문답이 지금은 소중하지만 가슴 시린 추억이 되어버릴 것을 알기라도 한 걸까. 그토록 꽃을 사랑하고 순수한 소녀처럼 늘 활짝 웃던 엄마는 6년 전 갑자기 돌아가셨고 내 가슴속 꽃들도 모두 시들어버렸다. 너무 갑작스러운 이별이었기에 시간이 흘러도 아픔이 무뎌지지 않아 가슴속에 응어리로 굳어버렸고, 장례를 마치고 서울 가는 차 안에서 울려 퍼지던 라일락 꽃향기 맡으며..로 시작되는 이문세의 노래만 들으면 엄마 생각이 나 한없이 슬퍼진다. 똑같이 생긴 얼굴로 깔깔거리며 꽃무늴 찬양하던 모녀의 인연은 이생에서 끝났지만 엄마의 꽃사랑 유전자는 내게 고스란히 남아 나는 오늘도 꽃그림을 그리며 엄마를 기 있다. 



전직 의상 디자이너로 양장점을 운영하시손재주 최고의 엄마는 꽃무늬 옷감으로 자식들 옷 만들어 입히고, 정성과 사랑이 가득 담긴 음식들을 손수 만들어 먹이는 것에 늘 열심이셨다. 매 끼니 환상적인 밥상으로 모든 식구들의 혀를 살살 녹이는 것은 물론이고, 온갖 떡, 죽, 강정, 식혜, 과일주, 막걸리 등등의 전통 먹거리들도 레시피 없이 뚝딱 만들어낼 정도로 요리실력이  뛰어나 내 친구들 사이에서도 엄마의 장인정신과 천재성은 소문이 자자했다. 집에서 직접 콩을 삶고 메주를 떠서 된장, 간장, 고추장까지 만들 정도니 말 다했다. 그런 바쁜 엄마였지만 여러 가지 취미도 갖고 계셨다. 노래, 스포츠댄스, 공연 관람 그리고 꽃꽂이와 화초 키우기. 가장 좋아했던 건 바로 꽃미남.


꽃미남 아빠가 키우시던 백일홍에 여러 작은 꽃무늬들을 넣어 새로운 시선으로 그려보았다. 종이 위에 수채, 잉크. 2015.


붉은 덩굴장미, 철쭉, 맨드라미, 금잔화, 봉숭아, 해바라기, 나팔꽃, 코스모스...

정원 곳곳에 심어져 있던 엄마의 꽃들은 다채롭고 아름다웠다. 내가 태어나고 다섯 살 때까지 자란 정릉은 초이 싱그럽게 우거진 동네였고, 앞마당, 뒷마당, 뒷산, 실내에 다양한 화초와 농작물을 재배하던 부모님 덕분에 식물과 공존하는 것에 익숙해져 지금도 식물과 늘 교감하며 살고 있다. 혼자 남으신 왕년의 꽃미남 아빠는 현재 강원도 산골에서 서각가, 서예가로 예술혼 불태우며 제2의 인생을 살고 계신다. 작품 활동에 여념이 없으시지만 여전히 많은 채소와 꽃들을 재배 중이신 아빠는 엄마가 좋아하시던 코스모스와 옥수수도 키우시며 산골을 소박하고 와일드한 식물원처럼 꾸며 놓으셨다.  




영국 에든버러 왕립 식물원, 종이 위에 수채, 2018. 안 그래도 꽃에 미친 나는 식물원에만 가면 정신을 못 차리고 헤어 나오지를 못한다.


2007년 뉴질랜드에 가기 전 지역 선정을 고심할 때였다. 검색해보니 헤글리 파크라는 거대한 식물원이 있고, 집집마다 꽃이 많아 가든시티라는 별명을 지닌 크라이스트 처치가 내게 딱이었다. 바로 비행기표를 크라이스트 처치 행으로 끊고 봄이 한창이던 뉴질랜드로 날아가 식물원부터 달려가서 이국적인 꽃내음을 연신 맡고는 역시 나의 선택은 옳았다며 물개 박수를 쳤다. 생전 처음 보는 꽃들을 스케치북에 그리고 사진기에 담으며, 추울 땐 따뜻하고 습한 기운이 뿜어 나오는 글라스하우스에서 몸을 녹이며 열대식물들과 함께 했던 그곳에서의 아름답고 푸르렀던 한때.  


"정상은 아니야~"


식물원 때문에 살 곳을 정할 정도로 꽃에 미친 나의 이야기를 들은 어떤 이가 머리 옆을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며 한 말이다. 나를 너무 잘 표현한 것 같아 그저 웃었지만 나도 잘 안다, 내가 꽃에 미쳤다는 걸. 나도 그런 나를 잘 알기에 부정하지 않 그저 꽃구경 열심히 하고 꽃그림만 미친 듯 그릴뿐이다. 솔직히 머리에 꽃을 꽂고 싶을 때도 많이 있다. 예쁘니까. 그렇지만 외국에서라면 몰라도(뉴질랜드인 친구가 주먹만 한 왕 데이지 꽃을 귀위에 꽂고 피크닉을 즐길 때 너무 행복하고 예뻐 보였다!) 한국에서는 용기가 안 난다. 주목받으면 쥐구멍부터 찾는 안면홍조증 걸린 소심녀가 저지르기엔 감당할 수 없는 짓이다.  머리에 꽃을 꽂고 있으면 우선 미친년 소리부터 들을 게 뻔하니 그냥 꿈에서만 꽂고 현실에선 조용히 살겠다. 한국 가기 전에 영국에서라도 한번 시도해볼 생각이다. 할머니 돼서 후회하기 전에.


생각해보면 어릴 적 꽃을 따다 머리에 꽂거나 손에 꼭 쥐고 하루 온종일 그 꽃들과 함께 했던 모든 순간은 내가 처음으로 해본 본능적 퍼포먼스라 할 수 있겠다.


'꺾은 꽃은 버리지 말자.'


는 의미심장한 주제로 펼치던 꽃에 미친 세 살짜리 여자애의 행위예술.


몇 년 전까지도 틈나는 대로 꽃을 꺾어 들고 와 책갈피 사이에 말리던 잔혹한 예술인이 명상을 시작하고 오랫동안 망각해왔던 측은지심을 지닌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서 이제는 꽃이 아무리 예뻐도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꺾지 않는다.



그림으로 남기면 시들지 않고 영생할 그들을 찬양하며 나는 오늘도 붓질을 한다.


I Paint Flowers So They Won't Die. - Frida Kahlo


나는 꽃을 그린다. 그러면 그들은 죽지 않을 테니까. - 프리다 칼로


 Floral Tribute. 이 그림을 그릴 때 엄마가 돌아가셨다. 코끼리처럼 강하고 순수하던 엄마께 바치는 그림이다. 종이 위에 수채, 잉크. 201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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