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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논이Noni Dec 21. 2020

해바라기를 꿈꾸던 씨앗들의 근황

추운 겨울 새들의 피와 살이 되고 있는 해바라기씨(Ft. 새 그림)

거장 히치콕이 안겨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요즘


유년기에 TV에서 우연히 접한 히치콕 감독의 끔찍한 영화 '새'를 본 후 새 혐오증을 살짝 가지고 있던 내가 지금은 아침마다 새들에게 인사를 하고 모이를 주는 다정한 인간으로 변신 중이다. 작품에 새를 종종 그리긴 했지만 주문을 받거나 꼭 필요한 장면에만 그렸을 뿐 요즘처럼 자진해서 그린적은 없었고, 기억을 더듬어봐도 새에 대한 좋은 기억조차 없는 사람이 이렇게 바뀌다니..

 


뉴질랜드 비둘기 Kererū, 종이위에 잉크와 수채 2014. 케이와 짐의 집에서 2주치 방세대신 그려드렸던 그림들. 비둘기를 좋아하는 케이의 그림 주문이었다.



내게 트라우마를 선사한 히치콕의 영화에서처럼 호주에서 길을 걷다 크고 까만 새에게 마구 공격당하고 미친개에게 쫓기는 것보다 다급하게 줄행랑친 기억, 버스를 기다리는 도중 정류장 표지판에 앉아있던 새의 화장실이 되어준 친절한 내 어깨 보며 현기증이 났던 기억, 무릎에 특효약이라며 엄마가 즐겨 드시던 닭발을 보며 당시 세 살이었던 조카가 "손~ 손~" 하던 어이없는 기억.. 조카는 할머니를 자기만큼 작은 손을 가진 어린이를 먹는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마녀쯤으로 여겼던 게 틀림없다. 퉁퉁 불은 닭발은 어린아이의 손과 흡사하니까. 손가락 하나 없는 오동통한 아기 손.


양념이 잘 배인 닭발(사진출처:총각네 게장)


영화'새'부터 시작해 공포스럽던 새의 공격과 새똥, 그리고 닭발 마니아분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내 기준에선 전혀 아름답지도, 먹고 싶지도 않았던 징그러운 먹거리 닭발 등등의 이유로 내게 새는 관심 밖의 생명체였다. 그랬던 내가 새들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한 건 먼 나라에서 살고 여행을 하면서였다. 태어나 처음 듣는 신비하고 은은한 종소리를 연주하던 경이로운 새를 처음으로 접하고 감격에 겨웠던 순간부터였을까, 세상에 어떻게 저런 색깔이 존재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눈부신 연둣빛 깃털을 온몸에 휘감고 놀이터 나무에 앉아있던 총천연색 앵무새를 두 눈으로 본 그때부터였을까. 여행을 떠난 영국 시골의 집주인 대신 보름간 열한 마리의 닭들과 세 마리의 오리들을 돌보며 새와 공감하기 시작하던 그 초여름부터였을까. 점점 새에 대한 나의 잘못된 선입견이 옅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되고 어느새 틈만 나면 호수의 백조와 오리에게 모이를 주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도 날아다니는 쥐인 비둘기만은 여전히 멀리하고 있었는데...


2020년 7월 알을 품는 어미 비둘기
8월. 드디어 두 마리의 아기 비둘기 탄생!! 확대해보세요~

알 품기 고행


지난여름, 새들이 자주 출몰하는 정원에 우드 피존(나무 비둘기) 두 마리가 둥지를 트는 것을 목격한 후 보름이 넘도록 알을 품는 모습을 매일 관찰하고 사진기에 담았다. 내 방에서 가까운 곳에 뿌리를 내린 거대한 나무의  늘어진 가지 끝에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옮겨다 열심히 보금자리를 만드는 장면도 신기했지만 황색경보가 두 번이나 발령되도록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던 악명 높은 스코틀랜드 날씨에도 알을 품던 어미 비둘기의 모성은 놀라웠다. 녹록지 않은 노숙생활 및 알 품기 고행이었을 것이다. 한 번은 밤새 폭풍이 몰아쳐 둥지가 날아가지는 않았을까 너무 걱정돼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열어 확인해보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굳건히 앉아 있는 어미 비둘기를 보고 안심하고, 또 한 번은 아침부터 퍼붓는 비바람에 둥지를 튼 가지가 바이킹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180도로 오고 가는 통에 혹여나 알이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며 창가에 붙어 "어 어...!!" 외마디 비명만 계속 질러댔었다.


사람 간 떨리게 하는 그 미친 날씨에도 불구하고 어미는 롤러코스터 둥지 위에 시멘트를 바른 듯 절대 뜨지 않고서 결국 자식들을 지켜냈다. 그렇게 갖은 고생 끝에 태어난 두 마리의 아기 비둘기와 위대하신 어머님을 위해 해바라기씨 한 포대를 주문하고 창가에 뿌려놓았으나 여기가 맛집이라고 동네방네 소문이 났는지 다른 우드 피존들이 대거 합류하여 어쩌다 보니 다 같이 먹고산다. 하도 빨라서 사진은 못 찍었지만 작고 예쁜 새들도 와서 하나씩 물고 간다.


이 집 해바라기씨 맛있네~ 사진엔 네 마리지만 최대 일곱 마리까지 본 적이 있다. 덕분에 창가를 틈나는 대로 청소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겼지만 어쩌랴 먹이는 게 좋은걸..
솜털 뽀송뽀송한 아기 비둘기는 나를 봐도 도망가지 않고 느긋하게 먹이를 먹거나 명상하듯 앉아있다가 빅 똥을 선사해주고 가버리는 게 일상이었다.
아기보다 먼저 비행에 성공한 형아 비둘기로 추정. 한 마리가 안 보여 둥지에서 떨어져 고양이한테 먹힌 줄 알고 나무 아래를 샅샅이 뒤지고 난리도 아니었으나 알고 보니 첫 비행 성공
많이 성장한 아기 비둘기. 보통 성조가 되려면 3~6개월이 걸린다는데 8월 생이니 내년 초엔 어른의 모습으로 나타날 녀석. 이뻐 죽겠다.
거의 다 자란 아기 비둘기. 목 주변에 희끗한 털이 올라오고 있다. 여전히 나를 두려워하지 않고 제법 커서 다른 비둘기를 쫓아내고 먹이를 독점하기도 한다. 2020년 12월 17일


해바라기 씨앗들의 사정도 들어봐야 한다    


이전에 주던 새 모이에는 여러 잡곡과 씨앗이 들어있었는데 창가에 뿌리고 나면 유독 검정 큰 씨앗만 금세 사라지는 게 의문이었다. 제일 인기 좋은 검정 씨앗의 정체가 궁금해졌고 해체해본 결과 겉껍질을 벗기지 않은 해바라기씨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주문하게 된 검정 해바라기씨 15kg이 도착했고(그림 잔금을 받아 새들에게 한턱 쏜 기분파 그림쟁이) 스스로 기미상궁이 되어 까만 껍질을 벗겨 씨를 잘라 맛을 봤는데 세상에나!!! 이렇게 고소하고 감칠맛 나는 해바라기씨는 내생에 처음 먹어봤다. 껍질을 까지 않은 씨가 신선도를 유지하면서 고소한 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다니! 새들도 아는 거다. 혀에 닿는 맛과 향 그리고 그 식감을.



꿈꾸는 씨앗속을 내 마음의 눈으로 들여다보고 그림으로 그려보았다. 그리는 과정과 완성 후.


A Dreaming Seed Inside, 꿈꾸는 씨앗. 린넨 위에 아크릴 2013

7년 전 그린 씨앗 그림이다. 꿈꾸는 씨앗이라는 제목으로 그렸는데 자꾸만 요즘 새들에게 모이로 주는 해바라기씨와 오버랩되며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고 있다. 저 작은 씨앗 속에서 예쁜 해바라기 꽃이 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내가 쪼꼬미들의 꿈을 망쳐버린 건 아닐까? (이젠 하다 하다 씨까지 걱정하는 이 오지랖을 어쩔..)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저 해바라기씨들은

나무 비둘기와 한 몸이 되는 거라고.

새의 피와 살이 된다는 건

날아다니는 꽃이 되는 거나 다름없다고 여기자,

낭만적인 관점으로..


올해가 가기 전에 다 떨어져 가는 씨 한 포대 더 주문하고, 꿈꾸는 씨앗 시리즈를 더 구상해야겠다.

꿈꾸는 해바라기씨 그림.

그 까만 씨안은 비둘기들과 작은 새들, 그리고 수많은 꽃들로 채워지겠지.


아일랜드에서 밑그림을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 채색을 시작했다. 작년 말, 컵에 프린트해서 판매 중인데 아직 아무도 사지 않았다는 비극이
수채화와 잉크로 그린 새. 자진해서 그린 첫번째 새 그림이다. 2015년. 제비 그림은 호주에 있을 때 낸 동화공모전 응모작 2011. 조만간 동화책을 내고싶은 작은 꿈이 있다
뉴질랜드 비둘기를 찾아보세요. 키위새와 피아노치는 노란 눈 펭귄도 있어요! 자작나무 패널위에 유화, 2020.
고흐가 많이 그려서 나는 안그려도 돼 ㅎㅎ 하며 해바라기그림을 그린 적이 없었는데 찾아보니 한 점 있었다. 직접 만든 주전자에 떡 하니 그려놨었군 허허
첫 번째 꿈꾸는 씨앗. 대학 졸업전시회에 선보였던 역사적인 작품. 조합토로 만들었다. 옆에는 꿈꾸는 초승달.


*제 글과 작품을 감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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