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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사 공공근로를 아시나요?

사회복지사를 시작하다. 한국사회복지사협회 7년의 기억

나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인 1996년 12월 한국사회복지사협회에 첫 출근을 하였다. 그때는 4학년 2학기부터 취업하는 경우가 많아 졸업 전에 거의 취업을 했다.


비상근직 회장님과 상근 하는 부장님과 직원 1명과 나 이렇게 4명이었다. 여의도 월드비전 빌딩 한편에 한국사회복지사협회(이하 ”협회“) 사무실이 있었다.    

 

486 컴퓨터 2대를 두고 번갈아 가면서 워드 작업을 하고 모든 문서는 수기로 작성하여 결재를 직접 받았으며, 교수님 이신 회상님은 매일 방문하시어 협회 업무에 열심히 하셨다. 물론 담배를 엄청 피우셨고 술 또한 좋아하셨다. 난 매일 아침 출근해서 재떨이 청소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던 얼마 안 된 듯하면서 아주 오래된 듯한 시절이었다.     


협회는 회비로 운영된다. 당시 회원수는 4천여 명이었지만 회비를 내는 회원은 거의 없었다. 외부 프로그램 제안을 통해 사업비에서 인건비를 충당했으며, 위원회 회의를 하면 참여하신 교수님이나 관장님들이 참가 수당을 다시 주고 가시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렇게 열악한 그러나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할 것이라는 나만의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협회에서 나의 첫 사회복지사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협회 7년의 기억 속에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보람되었던 것은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을 위한 노력이었다.     


세미나, 포럼 개최는 다반사였고 위원회 회의는 거의 일상이었다. 조찬회의, 저녁 회의 등 사람에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협회였다.     


무엇보다 사회복지사의 열악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사회복지사의 자격제도의 강화가 필요했다. 이는 곳 협회의 영향력 확대와 연결된다.  국가시험과 자격증 관리, 보수교육 이 3가지가 핵심이다.   


그래서 먼저 보건복지부 소관 보건의료인 전문 단체들의 활동을 조사하였다. 대한의사협회, 대한약사협회, 대한한의사협회, 대한간호사협회, 대한물리치료사협회 당시엔 단체도 생소하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단체에 직접 연락해서 일일이 방문하였다. 친절하게 설명해준 곳도 있었고 비협조적인 아니 방문 자체를 꺼려하는 곳도 있었다. 


몇 달간의 노력 끝에 결국 나는 한국사회복지사협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결심하였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설천에 들어갔다. 각종 세미나, 포럼과 위원회 활동을 통해 법 개정(안)을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국회 보건복지 위원실 방문은 기본이고 보건복지부를 수차례 방문하여 보건복지부 산하 타 보건의료인 제도를 비교하며 사회복지사 제도의 개선을 요청했다.     



과천 정부청사를 들어가면 가정 먼저 출입증을 받고 보건복지부 건물로 가기 전 담배 한데 피우는 것이 나의 루틴이었다. 그곳에는 나 말고도 많은 외부 방문자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오늘은 담당자를 볼 수 있을지, 오늘은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오늘은 어떻게 답변을 들을지, 지루하면서도 답답한 싸움의 연속이었기에 들어갈 때 끝나고 나올 때의 담배 한 데가 나의 긴장을 풀어주는 유일한 도구였다. 물론 지금은 금연한 지 15년이 넘었으니 옛 추억일 뿐이다.     


복지부 담당자를 만나 정책 제안 등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누는 게 일상이었고, 기다리다 못 만나고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로비와 복도를 서성이며 무작정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참 고되고 힘든 시간들이었다.     


협회에서 업무를 하면서 보건복지부 여러 담당자를 만났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사회복지분야에 대한 관심과 도움을 주려고 노력해 주시던 한 분이 있었다. 그분의 이해와 협조가 있었기에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으로 사회복지사 국가시험, 자격증 업무 개선, 보수교육 제도가 실현될 수 있었다.      


한동안 사회복지사협회를 떠나서 다른 복지 분야에 일하다 잊고 있었는데 최근 코로나19 관련 방송 브리핑에 그분이 나오셔서 반가웠다.      


물론 사적인 관계는 없고 난 협회 과장이었고 그분은 복지정책과 담당 사무관이셨으니 많이 어렵고 불편한 관계였다. 하지만 항상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셨고 변화를 위해 함께 고민해주시고 노력해 주셨다. 그때는 우리만 생각하고 잊고 있던 이야기를 지금 생각해 보니 감사 인사 한번 제대로 못했던 것 같다. 사회복지사 제도 발전을 위해 힘써주신 그분께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렇게 2년여 작업 끝에 사회복지사업법의 개정을 이끌었다. 사회복지사 국가시험제도, 사회복지사 자격증 한국사회복지협의회에서 한국사회복지사협회로 이관, 이렇게 두 가지 과업이 완성되었다.     



국가시험을 협회가 직접 주관하기에는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많아 처음에는 국시원과 협력하여 국가시험을 시행하였다. 이후 시험을 직접 주관하는 것에 대해 보건복지부에서 부담을 느껴 다른 보건의료인처럼 사회복지사 국가시험도 국시원에서 시행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협회에 근무하던 담당 직원이 국시원으로 이직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고 지금도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안다.     


사회복지사 자격증 업무는 한국사회복지협의회에서 기존에 수행하고 있었다. 법 개정으로 발급 업무 위탁기관이 협회로 이관되면서 일정에 따라 트럭을 빌려 마포 삼창빌딩 앞으로 가서 협의회에 있는 사회복지사 자격증 관련 각종 서류를 모두 트럭에 실어 여의도 월드비전 빌딩에 있는 한국사회복지사협회로 옮겼다.     



그때는 그 많은 서류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가 더 걱정이어서 협회 단칸 사무실 테두리를 철제 케비넷으로 둘러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이 어쩌면 사회복지사협회 발전의 첫 시작이었던 것 같다.      

물론, 한국사회복지협의회에서 자격증 발급 업무 이관에 대해 불편해했지만 사회복지사를 위하는 길이라 부정적인 시각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지금은 협의회가 본연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규모도 엄청 커졌으니 다행이다.     


처음에는 한국사회복지사협회에서만 자격증이 발급되었고 신규 신청자들에게 회비 납부도 독려하며 회비도 직접 받았다. 그러다 보니 업무적으로도 과부하가 났고 회비를 중앙에서 받는 것에 대한 열악한 상황에 있던 지회들의 반발이 일어났다.     


원래 전국의 회원들은 한국사회복지사협회 중앙협회로 회비를 납부하는 것으로 정관 규정에 명시되어 있었다. 지회는 물론 중앙도 직원 급여도 제대로 못주고 있던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던 시기였고 그래서 지회 담당자들은 주로 회장이 일하는 기관 담당자가 업무를 같이 봐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결국 중앙협회에서 전국의 모든 자격증 신청 서류를 받는 행정적인 어려움을 개선하고자 각 지방협회를 통해 서류를 접수하는 것으로 변경하였고, 이 과정에서 지방협회에서는 자격증 발급을 신청하는 예비 사회복지사를 대상으로 회비 납부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반 강제적인 회비 납부 문제도 불거져 보건복지부에 민원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래저래 참 부끄러운 현실이었다.     


이렇게 조직적 한계의 탈출구가 생기다 보니 여러 이해충돌 문제가 생겼다. 이에 당시 함께 근무하던 사무총장의 제안으로 중앙은 자격증 발급비를 받아 운영하고, 중앙협회에서 받던 회비를 지방협회에서 직접 받도록 권한을 지회로 넘겨주었다. 그래서 해당 지역 사회복지사들이 납부한 회비가 해당 지역 협회를 통해 해당 지역 사회복지사들을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개선한 것이다.      


이 전환점은 지금의 지방사회복지사협회 발전의 시작점이 되었다. 졸업생이 수천 명씩 많이 나오는 지회는 수억 원의 수익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점점 규모가 확대되었다. 물론 지역적 편차가 컸으며 그러한 상황은 지금도 그러한 듯하다.     


당시에는 협회가 회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유선 전화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 사회복지를 전공하시고 중앙일보 기자 출신이며 전문위원으로 활동하시던 이창호 위원을 홍보출판위원장으로 모시고 그분의 제안으로 월간지를 만들게 되었다. ”사회복지사 회보“였다.     


사회복지사회보 창간호(1997.4.1)


첫 창간호를 시작으로 1년여 만들다 이후 복지사회 2000이란 계간지로 변경했고 이후 Social Worker 월간지로 변경되어 지금 발간되고 있다.     


당시 회보는 4면~8면 정도의 신문형태로 매달 기획안을 만들어 기초 자료를 모아 주제와 대략적인 내용들을 작성해 두면 매주 시간 되실 때마다 퇴근 후 오셔서 컴퓨터에 앉아 회보 기사 편집 작업을 해주셨다. 시간이 늦을수록 거의 졸음을 참아가며 새벽까지 작업을 해주신 경우가 많았다. 난 그 옆에 앉아서 함께 이야기하고 수정하고 기사를 만들어 갔다. 밤 아니 새벽에 귀가하는 게 다반사였다. 협회가 교통비나 수고비를 드릴 재정적 여력도 없었고 저녁 식사 한번 제대로 대접해 드리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러한 회보 출간 이외에도 당시 협회의 어려움을 알고 사회사업 대학생 정보화 캠프를 운영하시던 사회복지 정보원 한덕연 원장님께서 본인이 개설하여 수년간 운영해오던 사회복지포털 사이트 welfare.net를 협회에 무상으로 운영권을 기중해 주셨다. 2000년 한국사회복지사협회는 처음으로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게 되었다. 


협회 창립 33년 만의 첫 시작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한 일이었는데 기증해주신 분께 협회에서 제대로 감사를 표시하지 못했던 것이 매우 아쉽기도 하다. 


이러한 관심과 도움으로 사이트가 시작되어 이후 이를 개정하여 한국사회복지사협회 홈페이지도 새로 만들게 되었다. 소통의 시대에 첫 소통의 창구를 만들어 주셨던 한덕연 원장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한편, 1997년 IMF 이후 사회복지계도 취업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대학에서는 많은 사회복지사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정작 취업할 곳이 없었다. 이렇게 사회복지사 취업난의 일시적 해결을 위하여 사회복지사 재가복지 공공근로라는 사업을 복지부로부터 위탁받아 시행했었다.


실업상태에 있는 사회복지사를 최소의 인건비를 지원해서 복지기관에 일정 기간 종사하게 해주는 것이다. 한두해 진행되었던 것 같다. 물론 사회 전반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인 만큼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복지사협회에 근무하면서 한때는 집 밖에서 자는 게 더 많은 해도 있었고, 탄천 주차장에서 중앙일보 벼룩시장에 참여하여 매주 토요일 새벽부터 저녁까지 한 해 동안 바자회에 참여한 일도 있었고, 자격증 발급 과정에서 외국 대학의 국내 비인가 사이버 대학 자격증 불법 취득으로 TV 뉴스에 인터뷰를 한적도 있었다.     


협회 창립 30주년 기념행사를 최초로 잠실 역도경기장에서 개최하는 것을 준비하는 와중에 부친상을 겪었고 회장님의 부탁으로 4일 만에 출근해서 행사 업무를 수행한 적도 있었고, 공동모금회가 설립되기 전 설립을 위한 세미나 개최를 지원해 준 적도 있었으며, 국내 최초로 전국 사회복지사 실태조사 사업을 수행한 적도 있었다.      


창립30주년 제8회 전국사회복지사대회(2007.5)


특히, 삼성 복지재단과 함께 만든 사회복지사 해외연수 프로그램은 지금도 사회복지사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물론 삼성의 지속적인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내가 처음 만든 프로그램이지만 나 역시 아직 한 번도 참여하지 못해 아쉽기도 하다.


뒷이야기지만 삼성 복지재단과 사회복지사 해외연수 사업을 시행할 당시 LG에서도 사회복지사 해외연수 프로그램을 같이 만들자는 제안이 왔었다. 삼성과 상관없이 유사한 연수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적극적인 제안이 들어왔지만 기존 사업을 같이 하던 삼성의 반대로 진행할 수 없었던 아쉬움도 있었다.      


처음 3명에서 근무하던 한국사회복지사협회에 10여 명이 근무하는 등 조금씩 성장해 갔지만 아직도 해결해야 할 사회복지 분야의 많은 정책적 제도적 문제들은 산적해 있었다.      


나는 이러한 지루한 싸움에 지쳐 결국 ’ 번아웃‘ 된 몸과 마음을 되찾고자 이직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직을 위해 1년여 동안 협회의 장기적인 발전 방안을 만들어 직원들과 수시로 공유하였다. 그러면서 업무를 정리하고 직원들이 각자의 업무를 책임 있게 수행할 수 있도록 조정하였다.      


나의 청춘과 함께한 어렵고 힘들었던 7년이란 시간 동안 우리나라 사회복지사를 위해서 그리고 사회복지분야의 정책과 제도 발전을 위해 일해 왔으니, 이제는 사회복지사로서 클라이언트를 위해 일하며 보람을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준비한 끝에 2004년 3월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로 이직하였다.      


이렇게 나의 새로운 사회복지사로서의 또 다른 인생이 시작된다.     


20여 년 전 나의 기억을 더듬은 이야기로 지금도 사회복지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 한국사회복지사협회 동료 사회복지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나도 평생회원으로 가입하여 회원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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