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에서 머문 숙소는 외관과 구조는 그대로 둔 채 내부를 용도에 맞게 소폭 변형시켜 활용 중인 오래된 건물이었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이런 건물을 자주 보게 된다. 편하게 살려면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지만, 이 정도의 불편함은 너무 소소해서 티도 안 난다는 이곳 사람들의 대범함이 읽힌다. 그래도 이 숙소는 엘리베이터를 갖추고 있었다. 리셉션에서 체크인을 마치고 엘리베이터까지 가는 길에 대여섯 단으로 이루어진 계단을 두 번 넘어야 했다.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넘을 때 '끙~'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나는 이 숙소가 좋았다. 시내에서 적당히 거리가 떨어진 한적한 동네에 머물며 사람들이 일상을 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즐거웠다. 동네를 오며 가며, 출근하는 모습, 아이를 유아차에 태우고 발걸음을 빠르게 옮기는 엄마의 모습, 이웃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또 좋았던 건 조식이다. 조식 서비스가 시작되는 시간에 맞춰 여남은 테이블이 놓인 식사 공간으로 들어서자, 각 코너에 음식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투숙객 중 내가 가장 먼저 아침 식사를 하러 온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빵 코너에 갈색의 빵들이 다양하게 비치돼 있어서 좋았다. 정제된 백색의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피해야 하는 내게 이보다 고마운 일이 없었다.
접시에 무엇을 담을지 생각하며 서 있는데, 식사 공간을 챙기는 직원이 주방에서 나와 내 방 번호를 묻곤 "오믈렛 드시겠어요?"라고 묻는다. 그러겠다고 답하고 접시에 통밀빵, 삶은 달걀, 오이, 파프리카, 방울토마토, 치즈 등을 담아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직원이 노란 달걀이 몽글몽글하게 담긴 오믈렛 한 접시를 내 자리에 가져다주었다. 알고 보니 원래 삶은 달걀 옆자리에 오믈렛이 놓여 있어야 하는데, 미처 준비되기 전에 온 나를 위해 따로 한 접시를 만들어 가져다준 것이었다. 뷔페식이어서 만들어 두면 가서 떠서 먹었을 텐데, 나를 위해 따로 만들어 준 그 정성이 고마웠다.
『조선 여성 첫 세계일주기』(나혜석 지음, 가갸날, 2018)를 보면, 1927년 6월 중순부터 1929년 3월 중순까지 약 1년 9개월간 세계 여행을 한 나혜석은 호텔이 아침밥을 끼워 1일분으로 치는 걸 기록해 두고 있다. 이 책을 읽은 후로 나는 '조식 포함' 조건으로 숙소를 예약할 때마다 나혜석이 떠오른다. 나혜석은 독일인의 '야(Ja), 야(Ja)' 소리가 프랑스인의 '위(Oui)'나 영국인의 '예스(Yes)'와는 다른 어푸수수한 맛이 돈다고 했다. '어푸수수하다'는 사전적으로, 머리 모양이 어지간하게 어수선하고 엉성하다는 뜻과 성미가 누긋하고 무던하다는 뜻이 있다. 나는 나혜석이 말한 '야'의 어푸수수한 맛이 어수선하고 엉성하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부드럽고 순하다는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어떤 느낌인지 파악해 보려 했으나, 독일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내게 '예스'라고 하지 '야'라고 하지 않아 알 길이 없었다.
나혜석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다른 투숙객들도 하나둘 자리를 잡고 접시에 음식을 담아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스피커에서 독일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행자의 목소리에 활력이 넘쳤고, 신나는 음악이 이어졌다.
책을 읽으려다 내려놓고, 한 변이 2센티미터 남짓한 마름모 모양의 가죽 책갈피를 읽던 페이지 오른쪽 맨 위 모서리에 끼웠다. 책갈피 중앙에는 대문자 알파벳 세 개가 적혀 있는데, 그것은 내 이름의 이니셜이다. 여행을 떠나오기 이틀 전, 그간 나를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짓누르고 있던 업무를 내려놓았다. 예정돼 있던 일이었다. 여름, 극심한 출장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몸이 벌벌 떨릴 정도로 허약해져 있던 상태였다. 쓰던 방을 정리하고, 후임에게 업무를 인계했다.
정이 많은 동료가 내가 그 업무를 그만둔다는 소식에 나를 찾아와 책갈피를 건넸다. 갑작스러운 선물의 이유를 말하진 않았지만, 그동안 수고했다는 의미에서 내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고르고 골라 이름까지 새겨 건넨 것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그럼 그냥 예쁘다고 하고 받으면 되었을 것을, 눈치 없이 "나한테 책갈피 많은데요."라고 말해 빈축을 샀다.
무수히 많은 책갈피 중에 그 책갈피를 들고 여행길에 올랐다. 동료에게 오믈렛을 배경으로 책과 책갈피 사진을 찍어서 전송했다. 한국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오후 업무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두세 시경이었다. 30분쯤 지나 느낌표가 잔뜩 찍힌 회신이 왔다. 뮌헨 사진도 보여 달라고 해서 풍경 사진 두 장을 선별해서 보냈다. 날씨가 좋아 보인다며 자신도 여기 있고 싶다고 했다. 동료의 메시지에 하트 이모티콘을 누르는 것으로 고마움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