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약 30년 전 늦가을에 파리 식물원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있다. 사진에는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나,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나보다 열다섯 살 많은 일본인 레이코 언니다. 어느 주말이었을 것이다. 그날 오후 레이코 언니와 나는 몽주 거리 소피 아주머니 집에서 나와 함께 걸었다. 그러다 식물원에 들어섰다. 처음부터 산책의 목적지가 식물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찍어 준 사진에서 우리는 편안하게 웃고 있다. 갓 스무 살을 넘긴 나는 딱 그만큼의 앳된 표정이고, 레이코 언니는 여유롭고도 호기심 많은 낯꽃이다. 그날 우리가 식물원을 한 바퀴 돌았던가? 조금 걷다가 사진을 찍고 돌아 나왔던가?
그해 프랑스 중부 도시에서 약 6개월간 어학연수를 받고 이어 한 학기 동안 파리의 대학 부설 어학원에서 수업을 들었다. 부설 어학원에서 학생들의 숙소를 알아봐 주었는데, 그때 소개받은 곳이 소피 아주머니의 집이다. 아주머니 집은 현관을 열고 들어가면 나선형 계단이 있고, 층마다 각각의 집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파리의 전형적인 주거용 건물에 있었다.
소피 아주머니는 어린 딸 로르와 둘이 살고 있었다. 방 두 개는 나 같은 외국 학생에게 세를 주었다. 레이코 언니는 나보다 며칠 뒤 소피 아주머니 집으로 들어왔다. 미국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프랑스어를 공부하러 파리에 왔다고 했다.
거실 중앙에 커다란 식탁이 있어서 부엌에서 만든 음식을 식탁에 가져와 먹었다. 한쪽 벽면에 소파가 자리해 있었고, 소파 옆 책상 위에 미니텔(인터넷이 보급되기 전 정보 검색, 전자상거래 등이 가능했던 프랑스의 통신 단말기)이 놓여 있었다. 소피 아주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로르를 보육 시설에 데려다주고 먼 거리의 학교로 출근해야 해서 주로 아침 일찍 로르와 함께 집을 나섰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가사도우미가 집에 들러 청소를 하고 돌아갔다.
가끔 로르의 아빠가 와서 소피 아주머니, 로르와 함께 식사를 하고 갔다. 로르 아빠는 소피 아주머니보다 스무 살은 많아 보였고 둘 사이는 그리 친밀해 보이지 않았다. 대하기 어려운 손님이 집에 와 있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아주머니가 내게 그를 '남편'이라고 칭하지 않고, 일관되게 '로르 아빠'라고 언급했기 때문에 소피 아주머니, 로르, 로르의 아빠가 서로 어떤 관계로 묶여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집에 가면 아빠가 있고 엄마가 있고 자식이 있어야 정상이라고 믿는 단일한 세계에서 온 나는 솔직히 로르 가족을 향해 말초적 궁금증을 품었던 게 사실이다.
나는 소피 아주머니 집에서 사고를 많이 쳤다. 짐을 푼 첫날이었다. 방 정리를 하고 욕실 선반에 내 물품을 올려놓았다. 그때 집에는 나 혼자만 있었다. 건네받은 열쇠로 문을 열고 잠그는 연습을 해 보기로 했다. 밖으로 나가서 문을 잠가도 보고 열어도 보았다. 그러곤 '안에서는 문을 어떻게 잠그지?'라는 생각에 구멍에 열쇠를 넣어 보았다. 그런데 뭔가 뻑뻑한 느낌이 들더니 열쇠가 구멍에 박힌 채 어느 쪽으로도 돌아가지 않았다. 문이 그 상태로 잠겨 버린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서 있는데, 소피 아주머니와 로르가 문 앞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머니가 문을 열려다 열지 못하고 "이게 무슨 일이지?" 한다. 문에 바짝 붙어 서서 소리쳤다. "제가 열쇠를 넣었는데 빠지지 않아요." 아주머니가 하라는 대로 열쇠를 이리저리 돌려 보는데 진전이 없었다. 아주머니가 잠깐 있어 보라고 하더니 어느 남자분을 모시고 왔다. 문 위에 아주 작은 창문이 있었다. 아저씨가 사다리를 타고 몸을 비집고 그 작은 창문을 가까스로 통과해 내가 있는 집 안으로 진입했다. 내 쪽에는 사다리도 없었기에 공중에서 바닥으로 거의 뛰어내리다시피 했다. 그러곤 내가 꽂아 놓은 열쇠를 구멍에서 있는 힘껏 빼냈다. 그러고 나니 문이 열렸다.
소피 아주머니가 어안이 벙벙해 있는 내게 말했다. "아유, 참 재밌는 아이구나!" 탓하거나 잘못을 지적하기보다는 놀랐지만 재미있었다는 투였다. 허탈해진 나는 실없는 웃음만 나왔다. 아저씨는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듯이 아무런 생색도 내지 않고 돌아갔다. 그분은 누구였을까? 내게는 슈퍼맨이었다.
두 번째 사건도 집에 혼자 있다가 맞닥뜨렸다. 벨이 울려 문을 열었더니 점프슈트를 입은 남자가 작업 도구를 들고 서 있었다. 그는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성큼성큼 집으로 들어서 부엌으로 향했다.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부엌에서 어떤 작업을 시작한 것 같아 다가가서 물어보았다. "혹시 소피 아주머니가 요청해서 오신 건가요?" 아주머니가 요청한 일이라면 누가 올 거라고 얘기를 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남자가 나를 바라보더니 '법원(tribunal)'이란 단어를 들먹이며 자기가 잘못한 것은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때 레이코 언니가 집에 도착했다.
자초지종을 언니에게 설명하는 사이 남자는 짐을 챙겨 게두덜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언니가 놀란 나를 달래며 "괜찮아, 괜찮아. 만약 네가 돈을 물어 줘야 한다면, 우리 둘이 반반씩 부담하자." 자신이 간여하지 않은 일에 반반씩 부담하자는 말이 즉각적으로 나올 수 있는 일일까? 그때 내가 울었던가? 언니는 열 살도 더 차이 나는 내가 그저 안쓰러웠던 걸까? 다행히도 돈을 물어 주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하루는 소피 아주머니가 재직 중인 초등학교에서 바자회를 연다고 해 레이코 언니와 물어물어 찾아가기도 했다. 아주머니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가 우리를 발견하곤 반갑게 맞아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아시아인을 벌레 보듯 하는 백인 인종 차별주의자 할머니에게 걸려 혼쭐이 났다. 지팡이를 들었다 놨다 하며 우리를 향해 독설을 내뿜었다. 둘은 할머니에게서 얼른 멀어져 안전한 곳으로 몸을 숨기곤 서로를 마주 보며 후들거리는 심장과 다리를 진정시켰다.
한국에 돌아와서 레이코 언니, 소피 아주머니와 가끔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언젠가부터 연락이 끊겼다. 내가 언니에게 사진을 보내 주었을 테니, 언니도 같은 사진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두의 안녕을 빈다.
* 레이코, 소피, 로르는 실제 이름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