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가 왜 좋았을까

by 꽃마리

바다와 공장이 있는 소도시의 어느 여자고등학교는 제2 외국어로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그 고등학교에서 나는 훌륭한 프랑스어 선생님을 만나 노란색의 작고 얇은 교과서 두 권에 실린 내용을 꼼꼼하게 배웠다. 선생님은 우리가 알아야 할 문법과 발음을 조용히 그리고 정확하게 가르쳐 주셨다.


나는 이 교과서 두 권을 버리지 못하고 아직 간직하고 있다. 가끔 열어 보기도 하는데, 누렇게 변한 내지 위에 꽤 열심히 공부한 흔적이 있다. 삼화출판사에서 나온 ‘문교부 검정’ 교과서로, 저자 두 명 중 한 명의 이름이 ‘LEE WHAN’이다. 나는 저자의 이름이 ‘이환’일지, ‘이완’일지 궁금해하곤 했다. 오래된 책이 그렇듯 책장을 넘기고 나면 코와 눈이 맵다.


영어에 비하면 프랑스어 문법은 처음에 외울 게 많은 편이다. 인칭에 따라 동사 변화가 다채롭고, 관사나 형용사는 명사의 성과 수에 일치시켜야 한다.


동사 ‘말하다’의 현재 시제를 예로 들면, 영어에서는 주어가 3인칭 단수일 때만 s를 붙여 ‘speaks’라고 하는데, 프랑스어에서는 ‘speak’에 해당하는 동사 ‘parler’가 1인칭 단수 주어를 만나면 ‘parle’, 2인칭 단수면 ‘parles’, 3인칭 단수면 다시 ‘parle’, 1인칭 복수면 ‘parlons’, 2인칭 복수면 ‘parlez’, 3인칭 복수면 ‘parlent’로 변화한다. 동사 원형이 'er'로 끝나는 1군 규칙 동사라서 그렇다. 하지만 ‘er’로 끝난다고 해서 모두 이 규칙을 따르는 것도 아니고, ‘er’로 끝나는 동사만 있는 것도 아니니 외울 것이 많다.


영어에 ‘the’만 존재하는 정관사는 프랑스어로 세 가지다. ‘le’, ‘la’, ‘les’. 남성 명사 앞에는 ‘le’를, 여성 명사 앞에는 ‘la’를, 복수 명사 앞에는 ‘les’를 붙인다. 적용해 보면, ‘그 카페’는 ‘le café’, ‘그 노래’는 ‘la chanson’, ‘그 아이들’은 ‘les enfants’이다. 물론 이보다 더 복잡한 언어가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복잡한 문법을 공부하는 게 귀찮지도 어렵지도 않았다. 그저 신기하고 재미있기만 했다. 프랑스어 수업이 더 기다려졌던 건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한층 지루해진 영어 수업에 대한 반대급부였는지도 모르겠다. 심심하면 연습장을 펼쳐 놓고 프랑스어 동사 변화 연습을 했다. 지금 내가 구사하는 프랑스어는 고등학교에서 습득한 지식에 기초한다.


이변 없이 대학 전공으로 불어불문학을 선택한 나는 4학년이 되어, 내가 나온 고등학교로 교생 실습을 나갔다. 선생님들이 주기적으로 다른 학교로 이동하는 공립 고등학교였지만, 내게 프랑스어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 다시 이 학교에 부임해 계셨다. 나는 선생님이 담당하시는 반에 들어가 수업을 참관하며 선생님이 학생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프랑스어를 처음 배우는 고등학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지켜보았다.


정해진 한 달의 끝 무렵에 이르렀을 때 나는 선생님이 뒤에서 지켜보시는 가운데 단독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내가 간직하고 있는 교과서 안에 딱 그만한 크기의 빳빳한 수업 지도안이 함께 들어 있다. 수업 시연이 끝나고, 교과서에 수업 지도안을 끼워 놓았을 것이다. 수업 지도안의 형식은 간략했다. 년, 월일, 시수를 쓰는 칸이 상단 오른쪽에 있고, 단원과 소단원을 쓰는 칸이 상단 중앙에 있다. 학습 목표를 쓰는 칸에는 요즘의 교육과정에서는 쓰지 않는 지도 목표라고 쓰여 있다. 수업의 중심에 학생이 아닌 교사가 있음을 방증하는 자료다. 하단에는 학교 이름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학교에서 공통으로 활용하는 지도안인 모양이었다.


수업 시연 내용은 대명동사의 재귀적 용법과 시간에 관한 것이었다. 기억이 난다. 나는 종이 인형과 종이 시계를 그리고 색칠하고 오려서 코팅한 다음 ‘찍찍이’로 칠판 한쪽의 부직포에 붙였다 뗐다 하면서 ‘나는 아침 7시에 일어납니다’, ‘나는 밤 10시에 잠에 듭니다’ 등의 문장을 만드는 시연을 보였고, 학생들은 나를 따라 문장을 연습했다. 나름 학생들과의 상호작용을 고민하며 진행한 활동 수업이었다. 학생들에게 몇 시에 일어나고 잠드는지 질문도 했을 것이다.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로 함께 걸어가는 길에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며 “브라보!”라고 말씀해 주셨다.


내가 직업으로 삼아 꽤 긴 세월 동안 하고 있는 일은 프랑스어와 전혀 상관없다고 한동안 생각하고 있었다. 직업적으로 더 필요했던 분야의 지식은 대학원에 진학해 보충했다. 일도, 새로운 전공 공부도 재미있었지만, 프랑스어를 처음 배울 때의 설렘만큼은 아니었다. 조금 더 버티며 프랑스어를 쓰는 일자리를 계속 찾아봤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일상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며 영화, 음악, 책으로 프랑스어를 즐기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포기하지 않은 일이 있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되기도 한다. 내 직업과 무관하다는 생각도 버린 지 오래다. 언어와 문학에 대한 관심이 읽고 쓰는 업무에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전 13화책 읽고 연극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