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0일은 프랑스 전역에서 시위와 파업이 예고된 날이었다. 참여자들은 프랑수아 바이루 총리의 2026년 예산안에 반대해 '모두 봉쇄하자(Bloquons tout)'를 구호로 내걸고 정부를 압박해 오고 있었다. 정부도 대규모 시위에 대비해 병력을 투입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예산안에는 사회복지와 공공서비스 예산을 삭감하고, 연금 지급액을 동결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시위 이틀 전 바이루 총리는 의회의 신임투표에서 신임을 잃고 사임했고,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곧바로 세바스티앙 르코르뉴를 신임 총리에 임명했다. 시위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시위와 진압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한 상황으로 번지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에 숙소를 나서는 발걸음이 평소만큼 가볍지 않았다. 하지만 숙소 앞과 지하철은 평소와 다른 점이 없었다. 목적지인 생제르멩데프레 지하철역 주변 거리에도 시위나 파업 조짐은 전혀 없었다.
보나파르트 거리를 지나 생쉴피스 교회까지 걸어가 보았다. 생쉴피스 교회 앞 광장 주변은 지나가는 버스와 지나치는 사람들로 늘 분주하다. 교회를 등지고 오른쪽 방향 길모퉁이에 붉은색과 흰색 줄무늬 차양의 카페가 있다. 파리의 여느 카페처럼 손님들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을 보도에 내놓은 카페다.
1974년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사흘간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은 이 카페에 앉아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기록한다. 주로 버스가 많이 보이고, 아는 사람들도 지나간다. 『땡땡의 모험』에 나오는 밀루처럼 생긴 강아지도 자주 지나가는데 페렉은 이런 강아지들을 그냥 '밀루 종'이라고 부른다. 한창 일본인이 유럽 여행을 많이 할 때라 일본인 관광객들이 자주 포착된다. 그의 관찰은 『파리의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라는 매력적인 제목의 책에 담겨 있다.
이 책을 읽고 난 뒤로 페렉이 앉아 있던 그 카페는 내게 그냥 카페가 아니다. 앉아서 바깥 풍경을 잠깐이라도 지켜보며 나를 소진시켜 보고 싶은 곳이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가려고 입구로 들어서는데, 카페 직원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영어로 말했다. "지금은 영업을 못 해요." 파업에 동참하려나 보다고 생각하는 찰나, "주방 전기가 나갔어요."라는 말이 들려왔다. 언제 복구되냐고 물으니 한 시간쯤 뒤라고 했다. 프랑스어로 "유감이네요."라고 말하고 돌아섰다.
페렉은 1936년에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폴란드계 유대인이다.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어머니는 1943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어머니는 수용소로 끌려가기 직전에 일곱 살 아이만 기차에 태워 피난을 보냈다. 페렉은 극도로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 덩그맣게 혼자 남았다. 그런 페렉에게 글쓰기란 무덤이 없는 어머니에게 무덤을 만들어 주는 과정이었다는 이야기를, 『나는 태어났다』를 직접 번역하고 펴낸 출판사 대표의 강의에서 들었다.
강의에서 들은 바로, 페렉은 자신의 글쓰기에 엄격한 형식적 제약을 가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를테면, 아파트를 100칸으로 나누고 마치 건축가가 각 칸을 설계하듯 칸마다 이야기를 만들어 내거나, 알파벳 e를 쓰지 않고 소설을 쓰거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문장으로 쓰거나 하는 식이다. 듣고 보니 생쉴피스 교회 앞 카페에서의 관찰 역시 제약의 글쓰기와 맥이 닿는 느낌이다. 아직 그의 책을 두 권밖에 읽지 않았지만, 연희동의 어느 책방에서 진행된 강의에 참석한 후로 페렉의 이야기와 생애에 끌려 파리에 갈 때면 생쉴피스 교회 근처를 자꾸만 서성이게 된다. 며칠 후 20구에서 시골풍으로 조성된 구역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조르주 페렉 거리를 발견했다. 너무 신기하고 반가워서 짧고 좁은 그 거리를 혼자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했다.
언론사 SNS를 통해 샤틀레(Châtelet) 일대에서 시위자들과 병력 사이에 거센 대치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그날 샤틀레 근처의 한 한국 식당에서 화재가 났다. 화재 모습이 담긴 영상이 자주 SNS에 떴다. 그 무렵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받은 메시지에는 프랑스가 어수선한 듯하니 조심히 다니라는 당부가 빠지지 않고 들어 있었다.
어느 나라라도 그럴 테지만, 특히 요즘 프랑스 정치는 바람 잘 날이 없는 것 같다. 왜 그럴까 궁금해져 의회 정당 분포를 살펴보았다. 지금의 의회는 2024년 7월 총선의 결과로 구성되었는데, 어느 진영도 전체 577석의 과반인 289석 이상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의회는 크게 세 개의 진영으로 구성돼 있다. 사회복지 강화, 공공지출 확대, 경제적 불평등 해소를 강조하는 좌파 진영(182석, 사회당, 녹색당, 공산당 등이 포함돼 있다), 시장 친화적이고 개혁적인 중도 진영(163석, 여기에 마크롱 대통령과 신임 총리 르코르뉴가 소속된 정당 '르네상스'와 프랑수아 바이루 전 총리의 소속 정당 '민주운동' 등이 포함돼 있다) 그리고 극우 진영(143석, 두 차례에 걸쳐 마크롱과 함께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에 진출한 마린 르펜이 소속된 정당 '국민연합' 등이 포함돼 있다)이 있다.
좌파, 중도, 극우 진영은 각자 정체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정책적으로 서로 연합이 어려운 구조다. 중도 진영의 총리가 내놓은 2026년 예산안은 다수파가 없는 의회 내에서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해 이 글을 쓰고 있는 2025년 11월 중순까지도 아직 통과되지 못한 상태다.
내가 지나다니는 길은 평온하고 평화로웠지만, 길 아래에는 다른 생각과 마음 들이 이리저리 충돌하며 만들어 내는 시끌시끌한 불협화음이 내재돼 있었다. 절대다수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할 테니 오히려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 길을 걸었다. 각자 손에 들고 있는 지도나 나침반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