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의 집에 가고 싶어서 파시(Passy)로 이동했다. 배가 출출해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파시 시장으로 들어갔다. 실내에 있는 상설 시장이다. 시장 입구 꽃 가게에서 진열해 놓은 함박웃음 같은 꽃들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머문다.
갈레트를 파는 가게가 있어 바에 앉았다. 메뉴를 골라 주문하니 샐러드도 먹겠냐고 물어 그러겠다고 했다. 자리에 앉을 때만 해도 치즈나 달걀만 넣은 가벼운 갈레트면 된다는 생각이었는데, 돼지고기 살코기 세 점, 쪽파에 겨자 소스가 올라간 갈레트 한 접시, 샐러드 한 접시로 한 끼 든든하게 먹었다.
발자크의 집으로 가기 위해 라농시아시옹 거리(Rue de l'Annonciation)로 들어섰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를 예고하는 일화인 수태고지가 거리의 이름이다.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해 겨울에 둘이 일주일간 파리 여행을 와 이 거리에 묵은 적이 있다. 각종 식재료 상점과 식당 들로 활력 넘치는 거리를 걸으며 파시 시장에서 굴도 사 먹고 발자크의 집에도 들어가 보고 그랬다.
파시 지하철역 근처에서 다리를 건너면 바로 에펠탑이 있어 그 일대를 걷고 있자면 에펠탑이 불쑥불쑥 시야로 들어온다. 강 건너에 있기 때문에 전체를 보지 못할 정도로 가깝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아주 조그맣게 보여서 실감이 안 날 정도도 아닌, 보는 사람의 입에서 감탄사를 끌어내기 맞춤한 거리를 유지하며 에펠탑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파시에서 보이는 에펠탑은, 어떤 아름다움은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을 때 완성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에펠탑을 바라보기 딱 좋은 위치다.
발자크의 집은 군데군데 수리를 진행하고 있었다. 수리하는 분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몸을 조심히 움직이며 방을 둘러보았다. 발자크의 집에서 발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소설 『노처녀』의 교정쇄다. 검토용 인쇄본인 교정쇄 종이 위에 '최최최최최최최최종'에 이르기까지 발자크가 펜으로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한 문단 길이의 글을 새로 포함하거나, 애써 쓴 글을 모두 지워 버리거나, 거의 새로 쓰다시피 수정한 단락이 많았다. 아홉 번째 교정쇄 수정 후 출판이 이루어진 모양인데, 최종본 위에도 수정 표시가 많았던 걸로 보아 수정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출판사 직원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발자크는 다작을 한 작가로 유명하다. 90편 이상의 개별 작품이 총서 『인간 희극』에 묶여 있다. 발자크는 자신이 만들어 낸 인물을 여러 작품에 다시 등장시켰다. 작품 세계를 통합하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탐구를 심화하려는 목적이라는 평이 일반적인데, 많은 작품을 쓰기 위한 시간 절약의 목적도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씀씀이가 커서 빚을 갚기 위해 글을 열심히 써야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지만 그의 사생활은 잘 알지 못하니 논외로 하고, 내게 발자크는 글쓰기에 진심이었던 부지런한 작가로 남아 있다. 교정쇄를 보고 나서 그런 생각을 완전히 굳혔다. 발자크의 집에는 고리오 영감을 포함해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의 모습이 전시돼 있다.
집을 둘러보고 나오려는데, 입구에 있던 직원이 아직 한 곳을 더 봐야 한다며 바로 옆 작은방으로 안내했다. 그러곤 "벽장문을 열어 보세요." 한다. 그 안에 가계도를 설명하는 그림과 자료가 있었다. 천천히 읽어 보고 벽장문을 닫았다. 인사하고 정원으로 나가려는데 직원이 다시 덧붙인다.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요. 햇볕과 정원을 즐기세요." 여름의 해와 가을의 바람이 공존하는 날씨였다. 그러지 않아도 정원 카페에 갈 생각이라고 말하니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쳐 주었다.
사람들이 카페 실내와 야외 테이블에 앉아 샐러드를 먹거나 차나 커피를 마시며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처럼 혼자 온 사람들은 책을 읽거나 태블릿으로 작업을 했다. 나는 야외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면지를 꺼내 놓고 갱스부르 기념관에 다녀온 일을 글로 어떻게 구성하면 좋을지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카페와 약 이십 미터 떨어진 커다란 나무들 주위에도 의자가 놓여 있어 테이블 없이 의자에 앉아 있는 손님들도 있었다.
내 자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나무 아래 의자에 청바지와 줄무늬 셔츠를 입은 젊은 여자가 몸을 앞으로 살짝 구부리고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내가 다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종이 자료를 들고 서서 의자 주위를 천천히 돌아 걷고 있었다. 입과 표정에 약간의 변화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나는 그녀가 발표 또는 강의 연습을 하는 게 아닐까 짐작했다. 그 행동의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오후 한때 잠시 들러 일상을 정비하고 갈 자연의 공간이 가까이 있다는 건 축복이 아닐 수 없다고 느꼈다. 공원과 공원 사이가 멀지 않고, 꼭 공원이 아니라도 공원의 역할을 하는 작은 공간이 거리 곳곳에 있다는 것이 일상을 사느라 바쁜 이들에게 따뜻한 위안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파리에선 늘 하게 된다.
학교에서 마련한 외국 학생 설명회에 간 아이가 나를 만나러 발자크의 집으로 왔다. 설명회에서 들은 내용을 조금 전해 듣고, 다시 파시 시장으로 갔다. 치즈 가게 앞에 서 있다가 가게 주인에게 제대로 영업을 당해 치즈 한 덩이를 샀다. 아이가 초밥이 먹고 싶다고 해 파시 지하철역 근처에서 초밥을 사 먹고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