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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박신영 Mar 02. 2016

내가 신을 믿는 방법

엔도 슈사쿠의 <사해 부근에서>를 읽으며

자신의 근원을 찾고자,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일은, 인간으로 났다면, 게다가 그 삶이 비루하고 곤궁한 처지에 있다면 그 존엄을 지키기 위해 더더욱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실은 '이 모든 일에는 그 어떤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정답인지도 모른다. 인류는 다만 지구상의 수많은 생물 중의 한 종일 뿐. 특히 더불어 살기보다는 다른 종을 멸종시키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데 재능을 가진 가장 탐욕스러운 종일 뿐인지 모른다.


인간이 '문화'라 부르며 만든 모든 것들은 다만 '무료했기 때문'이며, 비루한 삶을 버텨내고 마음을 모아 합심하여 살기 위해 종교가 필요했고, 의식주가 해결되자 남아도는 시간을 심심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낸 것들이 음악과 미술과 스포츠였다. 굳이 의미없는 것을 의미있는 삶으로 만들어보고자 노력한 것이 철학이며, 신의 영역에까지 도전하려 노력한 결과 살아있는 생물을 복제하는 유전공학을 발전시켰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공간을 정복하고자 끊임없이 우주를 탐구하는 물리학자들이 존재하고 있다.


   우주와 인류의 역사를 수평 수직으로 크게 보면 인류는 그저 지구의 생명체 중 자신들이 지구의 지배자라고 착각하며, 최근 들어 가장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특이한 하나의 종에 불과하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인간역사의 거시적인 모든 부분을 차치하고서, 그러한 종 중의 단 한 명, 비루한 삶을 살고 있는 나..로 집중해보자. 인간의 태어나고 죽음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한 편으로 받아들이기 매우 힘든 일이다. 작고 연약한 나는 이 거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의지할 구심점이 필요하고, 종교라는 구심점을 통해 모이고 돕고 서로 힘을 합해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 곁에 항상 함께하고 지켜주신다는 신이, 기도하면 응답해주신다는 신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해준 일은 사실 없다. 다소 냉소적이고, 다소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무조건 믿고 무조건 의지할 수만은 없다. 인류의 역사로 본다면 다신교를 인정한 로마에서 기독교인을 박해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수백만명의 사람이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와 카톨릭의 세력다툼을 위한 전쟁에서 죽었다.


내 주위에는 성령을 받고 진심으로 신을 믿으며 응답을 받으시는 분들이 여러 분 계신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기 2주 전 쯤, '꿈에 예수님께서 바다 깊은 곳에 침몰한 배를 가리키며 슬퍼하시더라, 그래서 의아하게 여기며 잠을 깼다' 는 이야기를 하시는 분이 두 분이나 계셨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독재와 착취를 벗어나려 도피하던 아프리카 난민들의 배가 정원초과로 300명 모두 사망했다는 기사도 읽었다.


  진실로 기적을 행하는 신이라면, 왜 이들이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이런 일이 행해지고, 구할 수 있음에도 구하지 않고 그저 슬퍼하고만 있었을까.


미션스쿨을 6년이나 다니고 교회를 7년째 다니고 있지만, 여전히 이러한 신의 침묵은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어려운 문제이다.


그 옛날 예수님 시대에 속죄를 위해서는 동물의 피를 보는 것이 필수였다. 양이나 가축이 아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며 흘린 피는 당시 인류의 죄를 모두 사하는 의미를 가졌고, 오늘날까지 예수는 어린 양과 동급으로 찬송가가 만들어 불려지기도 한다. 왜 누군가가 이 여리고 불쌍한 사나이를 피를 흘린 어린 양으로 만들어 인류의 죄를 사하도록 만들었을까.

   비루하고 미천한 삶의 의미를 찾고 함께 모여 큰 일을 이룰 수 있는 종교의 힘은 대단하지만, 진실로 이 삶에 직접적인 신의 기적을 보여주기보다는, 그저 침묵하는 것이 늘 신이 한 일이 아닌가. 눈 먼 이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미치광이를 제정신으로 만들고, 죽은 이를 살리신 기적은 그저 성서에나 쓰여져있다.


     우연한 기회에 지인으로부터 추천받은 책이 한 권 있다. 엔도 슈사쿠의 <사해 부근에서> 라는 책이다. 스스로 너무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 신을 믿기 어렵고, 기도하기 어렵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기를 권유드리고 싶다. 줄거리는 예수의 행적을 더듬어 사해 부근을 탐방하는 '나'의 이야기, 그리고 '나'가 늘 궁금해하던, 교활하고 비열하고 긍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예수회의 수사 생활을 중도에 포기한 폴란드계 유대인 코바르스키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더불어 2천년 전 쯤 사해 부근에서 펼쳐지는 예수의 행적이 환상처럼 전개된다.

    이 책에서는 작가의 주관에 따라 예수 라는 인물이 완전히 개조되어 묘사된다. 예수는 군중의 기대와는 달리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 없다. 오직 경이로운 모습으로 부각되어 있는 것은 예수가 가진, 초인적이라 할 수 있는 연민의 정이다. 가령 예수는 병자의 병을 고쳐주지는 못하지만 그 병자 곁에 끝까지 남아 고통을 나눈다. 작가가 묘사하는 예수의 모습에서는 거룩한 영감과 정열은 찾아볼 수가 없다. 성경에 나와있는 예수의 능력이 완전히 축소되어있고, 예수의 신성을 암시하는 초능력은 제로이다. 그런데 정말 묘한 것은 이렇게 능력 면에서 축소된 예수가 큰 감동을 안겨준다. 능력과 자질에서 오는 풍모 중 거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도 마지막 남은 작은 일부만으로 엄청난 감명을 주고 있다.

   또한 이 책에는, 고대 유대인 사회에서 굉장한 권위를 갖는 대사제직을 역임했던 안나스의 이야기도 나오는데, 안나스는 예수 라는 인물이궁금하여 체포된 예수를 불러오게 한다. 매우 초라한 예수에게 안나스는 일종의 회유책으로 놀라운 발언을 한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 체하는 기술을 나는 알고있다네.. " 대사제직을 역임한 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어 "하나님은 영원한 신기루 같은 것이지."라고 말한다. 안나스의 이런 생각은 보기좋게 겉칠해서 세상일을 탈 없이 끌고 가려는 모든 위선자의 비밀스런 처지를 대변한다. 세상의 많은 신앙인의 심리를 깊이 파헤쳐보면 거기에 이런 생각의 요소들이 발견되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작가는 정직하고 솔직하고 대담하게 이야기를 써 나갔다.


    "당신은 무력했고 그 무력함 때문에 나자렛에서 쫓겨났으며, 갈릴래아 여러 마을에서도 박대를 받으셨습니다. 당신은 무력했기에 예루살렘 사람들한테서 매도당하고 잡히셨으며, 무력한 당신 몸에서 짜낸 고통의 기쁨으로 많은 사람의 슬픔을 씻으려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 직전에 오른쪽 죄수에게 언제나 그대 옆에 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쥐한테도 누군가의 더러워진 손을 씻어주고, 아기의 사타구니를 깨끗하게 하도록 하셨습니다. (*'쥐'는 코바르스키의 별명으로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함, 비누로 만들어졌다는 뜻) 그리고 당신은 오줌을 싸면서 끌려가는 쥐 옆에서, 당신도 오줌을 싸면서 따라가셨고 마지막에는 당신 운명을 쥐한테도 허락하셨습니다. 그걸 인정하는 건 괴롭지만, 그것은 내가 당신 부활의 의미를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표시인지도 모릅니다."                                   

 <사해 부근에서> P384 필사, 바오로딸 출판사



합리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에 젖어있는 이가 신앙의 영감을 얻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지, 왜 신은 이 다함이 없는 기도에도 그저 침묵만 하는지 의구심만 들 뿐이다.


이러할 때에 내가 신을 믿는 방법, 이 비루한 삶을 버티고자 의미를 찾는 방법은, 그저 기억할 뿐이다. '언제나 그대 옆에 있겠다'는 말씀을. 때때로 복받쳐 눈물 흘리는 내 곁에서도 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울고 계시리라고. 말 못하는 우리 상우의 답답한 하루 중에도 같은 모습으로 항상 함께 하고 계실 것이라고.


    웹툰 작가 양영순의 <1001>에는 어릴 때 헤어진 두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가 나온다. 정해진 운명에 의하여 쌍둥이 한 명이 하루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제로 임명받은 다른 형제가 매일 아침 기도를 해주어야 한다.형이 하루라도 기도를 해주지 않는 경우 동생은 죽고만다.

    어느 날 괴한들에 의해 사제단원들의 눈이 멀어진다.눈이 먼 사제단은 장문의 기도문을 볼 수 없게 되어, 기도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다른 사제단원의 형제들은 다음날의 삶을 살아갈 수 없었지만, 여전히 이 쌍동이 동생은 매일의 삶을 살 수 있었다.

    

 후일 노예로 팔려간 형을 우연히 만나게 된 동생은,매일 아침 자신을 위해 형이 기도문을 외워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이 살아온 소중한 하루가 형의 기도 덕분이었음을 알게 된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할 때만큼 숙연해지는 적이 없다.

 나의 이 온전한 하루의 삶 또한 나를 마음으로 아끼는 누군가의 기도로 연명되는 것이 아닐까.

    

 고통스러운 가운데 있는 이에게, 내가 함께해줄 수는 없지만, 기도해줄 수 있다. 내가 구해줄 수 없지만, 신은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고 침묵하실 뿐이지만, 우리처럼 불쌍하고 가녀린 사나이, 예수 그 분은 당신의 어떤 순간에도 당신과 같은 마음으로 늘 함께 하고 계실 것이다.


    뉴스에서 아픈 소식을 들어 마음 아프더라도 내가 함께할 수 없기에,누구에게도 상처주고 싶지 않은 내 글에 대한 작은 소망사실은 누구에게도 상처주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저 이 모든 순간을 함께하고 계시는 그에게 기대어보며,기도드린다.


간절히 기도드리니,

누군가 이 하루 겪었을 좌절, 공포, 불안, 혼란, 슬픔을

따뜻이 어루만져주는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음을 알고

겸손하고 지혜로운 인류가 되길 바라옵니다..


당신께 간절히 기도드리니,


서럽고 힘든 이에게,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이에게,

당신이 함께 하며 그 고통을 한결같이 함께 겪어내고 있다는 것을..

세상 누구의 곁에도 임하시어 그 마지막 순간에는

당신께서 함께 계시어 평안하기를..

이 마음과 이 눈물로 진정 바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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