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작가님의 책 '쇼코의 미소'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우정 같은 연애보다 더 지난하고 힘들었던 것이 연애 같은 우정이라고 생각하며 지난 청소년기를 회고해본다. 10대 시절, 나는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서 제주도로 쫓기듯 이사를 갔던 적이 있다. 그곳에서 나는 육지에서 온 애, 일명 '육지 애'라고 불리며 동네에 소문이 날 만큼 많은 관심을 받았었다. 부모님이 워낙 이국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어, 나 또한 혼혈이냐는 질문도 받으면서 정말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책상 주위로 친구들이 모여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연애 같은 우정을 나누는 친구들이 생겼는데 문제는, 연애처럼 깊은 마음은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줄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이어서 나와 유독 단짝이 되려고 했던 두 친구 사이에서 크게 골머리를 앓았었다. 내가 좀 더 마음이 기울었던 친구, 함께 있으면 더 편안했던 친구 말고도 나를 한시도 혼자 두지 않으려고 했던, 질투 많은 친구가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 둘은 서로를 미워하며 싫어했던 사이였고, 나는 그 중간에서 난처함에 뻘뻘댔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시작된 내 인생 첫 연애 같은 우정은 육지로 돌아온 후에도 쭉 이어졌다. 육지에서는 '제주도에서 온 애'로 전학 온 학교 친구들의 관심을 받았다. 나에 대해서 호기심을 보이는 친구들이 먼저 다가와 함께 놀자고 말했고, 문구점에서 산 자그마한 다이어리에 요일마다 놀기로 약속한 아이들의 이름이 다 다르게 적혀있을 만큼 전학 온 초반엔 나름 인기가 많았던 것 같다. 참 희한한 게 또 나와 단짝이 되고 싶어했던 친구들 몇몇이 등장했는데 그들의 존재는 당연히 감사히 여겨야 하는 것이었지만 제주에서 겪은 일 때문인지 피로도는 상당했다. 나의 10대 시절엔 여기저기 '베스트 프렌드'라는 단어가 널리 쓰였던 만큼 자연스럽게 '베스트 프렌드'는 반드시 존재해야만 했고 딱 한 명으로 정해져야만 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사실 '베프'로 묶이는 연애 같은 우정은 내게 맞지 않았다. 상대가 자유롭게 날갯짓을 펴고 이 사람, 저 사람 곁에 앉았다가 다시 내게로 날아오면 그때 기꺼이 맞이해주고, 또 다시 떠나가도 언제든 다시 돌아올 것을 믿고 기다리는 우정의 형태를 가장 이상적이고 편안해 하는 사람으로서 무척 고단한 날들이었다.
또 나는 친구들과 두루두루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다. 그렇다고 넓고 얉은 관계를 선호한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친구들 저마다의 매력을 느끼면서, 다양한 친구들을 알아가고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즐거웠다. 쉬는 시간마다 팔짱을 끼고 함께 화장실을 가며 서로의 곁에 다른 친구가 있는 걸 용납하지 않는 등 상대를 온전히 소유하려는 우정은 내게 오히려 독이었다. 상대가 내게 채워주는 애정, 나에게만 터놓는 비밀 등을 통해 그 친구에게 둘도 없는 단짝이 되는 것은 영광이자 기쁨이기도 했지만 가끔 부담스럽기도 했던 것 같다. 어떤 친구는 자신의 집에 나를 초대한 후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까지 나를 집으로 보내주려 하지 않는 일이 잦아 결국 집에서 날 걱정하며 기다리다가 성이 난 아빠가 그 친구와 더 이상 놀지 말라고 엄포를 놓기까지 했었다. 그 친구의 애착을 넘어선 집착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나머지 친구가 나와 놀기 위해 집으로 전화를 걸면 아빠가 대신 받고 집에 없다고 하거나 자고 있다는 거짓말을 하기도 했었다(ㅠㅠ).
물론, 연애 같은 우정에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참 어려서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에 사사건건 걸려 넘어지며 감정적으로 무너지는 일이 잦았던, 다사다난한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인생의 숱한 부침을 겪던 나를 단단히 붙들어주고 위로해준 베스트 프렌드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씩씩하게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항상 나라는 사람이 딱 한 명뿐이어서 모든 베스트 프렌드들(결국 내 성격대로 활개를 치며 살았기 때문에 여기저기 베스트 프렌드 후보는 생겨났다...^^) 을 향해 공평하게 나의 마음과 시간을 나눠줄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그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많이 서운해했던, 소유욕이 강한 친구의 하소연을 듣고 눈치를 보면서 나는 바람을 피고 전전긍긍하는 사람 마냥 괴로웠다(그들이 괴로움을 느낄까..? 이 비유가 맞는지 잘 모르겠다.) 이제 와서 내가 이런 고백을 하면 충격을 받게 될 구 베스트 프렌드들이 있겠지만 용기 내어 더 적어보자면 연애 같은 우정에 더 질려버린 이유가 그런 기억들이 켜켜이 쌓여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난 나의 친한 친구들을 다른 친구에게 소개시켜주기도 하고, 지금은 그 친구 둘이 나보다 훨씬 더 친한 베스트 프렌드가 되어 있어도 '우와, 잘 됐다!' 하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그 정도로 소유욕이나 독점욕, 질투심 같은 게 없는 편이라서 우정을 나누는 과정에서 연애하는 마음으로 임하는 게 맞지 않고 지금도 내게 '난 너 뿐이야'하고 다가오는 친구가 있으면 뒤로 살짝 물러난다. 그렇다고 해서 인연을 대하는 내 마음이 가짜란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사람의 1순위가 되려고 애쓰지 않을 뿐이다. 깊은 진심으로 상대를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며 적당히 건강한 거리를 찾아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상대의 모든 것을 다 알려고 하지 않고, 오롯이 상대를 내 소중한 친구 중 한 사람으로서 존중하고 아끼는 방식으로 우정을 이어나가려 한다. 그런 내 태도가 여전히 누군가의 마음을 속상하게 만들 순 있지만 상대에게 억지로 맞춰 연애하는 방식의 우정을 해나갈 자신은 없다. 상대에 대한 기만이자 가식이나 다름 없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을 뿐더러 그렇게 틈없이 달라붙어버리는 관계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하면 그 틈새로 새는 바람이 유독 시리고 춥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날, 유독 얼어붙은 표정을 하고 수업에 들어오는 학원생 아이가 있어서 최근에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주제로 글을 써보자고 했었다. 평소 말이 많지 않은 그 친구는 항상 글에서는 자신의 속에 있는 이야기를 와르르 꺼내놓아 나를 놀라게 하거나 즐겁게 하며 자주 감동을 주던 아이였다. 이번에도 역시나 그 친구는 '전 단짝'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깊게 마음을 주었던 한 친구로부터 받은 상처에 대한 글을 장문으로 써주었다. 나는 그 친구가 마지막 문장에 적은 '그 애는 내가 두려워하지만 잘 아는 사람이고, 너무 익숙한데 차라리 새롭고 싶은 친구다. 걔만 보면 마음이 복잡하다.' 라는 한 줄에 마음이 쿵, 하고 멈춰선 후 오래도록 붙들려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와 세상에 둘도 없는 단짝이 되고 싶어 했던, 그래서 내 곁의 다른 친구를 시기하고 날 집으로 돌려보내주지 않았던 친구의 마음을 내 것처럼 가지게 되어버렸다. 그 친구의 마음에 새겨진 푸른 멍자국이 희미하게 내 마음에도 번지는 것 같았다.
학원생 친구처럼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 수 없는 내향적인 성격의 사람들은 (아마도 대부분) 오로지 단 한 사람에게만 자신의 세상을 활짝 열어서 보여준다. 그렇게 자신의 세상으로 건너온 존재가 점차 스며들며 또 다른 하나의 세상이 되고 그 세상 속에서 가장 자유롭고 편안한 사람으로, 더 이상 무엇도 바랄 게 없을 만큼 행복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세상의 면적이 점점 줄어든다면? 끝내 완전히 닫혀버린다면? 나이를 먹을수록 세상엔 영원한 것이 없다는 걸 체감하다 보니 어떤 존재에게 자신의 전부를 거는 일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여기게 된 내가 하나 둘 금이 가기 시작한 우정의 독을 마주한 학원생 친구의 세상을 엿보게 되었다. 그 세상 속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진동에 잠깐 비틀거리다가 웃음과 눈물로 얼룩졌던 지난 우정의 기억들이 훌쩍 지나버린 세월을 비집고 다시 내게 돌아왔다.
세월로부터 얻었던 교훈을 되새기면서 그렇게 금이 간 것을 꼭 붙들고 있다가 네가 더 상처 입을지도 모른다고, 깨어진 조각이 다시 이어붙여질 가능성은 희박하며 그런 방식의 우정은 오히려 네게 독이 될지도 모른다고 조언을 해주고 싶어서 펜을 들었다가 다시금 내려놓았다. 써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동자는 방황하다가 지난 과거 속 다른 친구의 곁으로 총총 멀어져간 나의 야속한 뒷모습을 바라보았을, 또 다른 친구의 뒤통수에 고정되었다. 나의 전 단짝들에게도 어느 샌가부터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팔짱을 뿌리치고, 눈도 잘 마주치지 않고, 더 이상 전화도 받지 않고 메세지도 답장하지 않는 내가 두렵지만 잘 아는 사람이고, 너무 익숙한데 차라리 새롭고 싶은 친구였을까. 상대에 대한 모든 진실을 알고 있지만, 더 이상 진심은 나눌 수 없고 또 영영 모르는 남이 되어 살아갈 헤어진 연인이나 다름 없는 관계.
연애 같은 우정의 잔인함을 다시금 실감하면서, 우정 같은 연애보다 더 서럽고 아픈 이별의 수순을 밟고 있는 열네 살의 학원생 친구의 글에 어떤 답변을 해줘야 할지 한참을 망연해진다. 나 또한 복잡한 마음으로 그 시기를 지나왔던 한 사람이고, 그동안 연애 같은 우정을 하지 않으려 발버둥쳐 왔지만 매일 전화나 문자를 하지 않아도 무심코 안부를 궁금해하고 순간순간 얼굴을 떠올릴 만큼 내 친구들을 너무너무 사랑한다. 사랑하는 마음이 어떻게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을까. 금이 간 채로 추억이 찰랑찰랑 고여있는, 구 단짝들과 함께 빚었던 우정의 독이 아직도 내 마음 저편 깊숙이 존재함을 느끼며 더 이상 사람에게 기대를 하지 않아 무뎌진 줄 알았던 마음의 살갗을 매만져본다.
같은 시절의 공기를 나란히 들이마신 사람들, 서로의 향기가 짙게 배어있을 만큼 몸도 마음도 꼭 붙어있었던 사람들과의 이별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그 어려운 걸 어떻게든 이겨내고, 헤쳐나오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서 어떻게 함부로 조언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그 친구의 글에 아무런 답글도 달지 않기로 한다. 그냥, 그 친구가 교실에 오면 한번 꼭 안아주기로 한다. 그 아이에게 필요한 건 나의 포옹이 아니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널 기다리는 따뜻한 품과 허전한 곁이 있을 거라고 텔레파시로 전해보려 한다. 앞으로도 계속 될지 모를 그 친구의 연애 같은 우정을 응원하며 나의 우정 또한 삐뚤빼뚤하지만 귀여운 하트 모양으로 이어가보려 한다. 하트 그리기에 영 소질이 없는, 제멋대로인 나와 계속 함께 우정을 지속해주고 이제 막 시작해준 친구들아, 진정으로 고맙다. 팔랑팔랑 자유롭게 날아다녔다가 무사히 다시 돌아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