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 소설 등단, 일거리
졸업을 3개월 앞두고 내가 작성한 지원서에는 인턴 경력이나 수상 이력, 어학 점수가 없었다. 적어 낸 자격증은 운전면허증 하나였다. 구직 기간 동안 마주한 면접관들은 학부 생활 8년간 무얼 했느냐고 물었다.
2015년 봄 광고홍보학부에 입학했다. 이름이 그럴듯하다는 이유로 지원한 학과였다. 개론 수업을 몇 차례 듣고서 전공에 흥미를 잃었다. 벚꽃이 만발할 때 나는 전공 수업을 뒤로하고 교양 수업에 열중했다.
동기들은 공모전에서 입상하며 대외활동 이력을 쌓았다. 동기들이 선배들과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일자리 제의를 받는 동안 나는 혼자서 학식을 먹고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었다. 잠이 오면 모서리가 매끈한 하얀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잤다. 창가 자리는 볕이 잘 들었다.
배우를 하고 싶었을 때는 연기 레슨을 받으며 연극을 보러 다녔다. 격투기 선수가 되고 싶었을 때는 복싱 체육관을 들락거리다가 10cm가량 신장 차이가 나는 상대에게 훅을 맞고 아랫니를 다쳤다. 사진을 공부할 때에는 중고 매물이었던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한강 변을 걸었다. 때가 되어 군대에 들어갔다.
전역 후에는 얼마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 틀어박혀 하루에 한 끼를 먹었다. 보름도 안 돼서 수년간 관리한 살과 근육을 잃었다.
나는 내가 죽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고 싶었다. 납득 가능한 이유가 없는데도 삶을 탐하는 육신을 경멸했다.
고투 끝에 결론지은 바로 나는 자살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살며 소설을 쓰기로 택했다.
복수전공을 신청한 뒤 2020년부터 문예창작학과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예술대학교는 안성 캠퍼스 소속이었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두 시간을 가야 하는 통학길이었다. 버스에서 내리면 가축 분뇨 냄새가 났다.
낡은 강의실은 난방이 잘 되지 않았다. 초봄과 늦가을에는 노트북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시렸다. 대부분의 수업은 수강생끼리 서로의 작품을 합평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4학년이 되고 취업 준비를 마친 동기들은 하나둘 대기업에 취직하기 시작했다. 나는 초과 학기를 수강하면서도 소설로 돈을 벌겠다는 막연한 낙관에 빠져있었다. 등단하면 뭐라도 일거리가 생기지 않겠느냐는 심산이었다.
오산이었다. 일반적으로 등단을 하려면 신문사나 잡지사에서 주관하는 공모에 투고하여 일등으로 뽑혀야 한다. 등단한들 느닷없이 일거리가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야 숙고했다. 소설 등단의 지난함에 경도된 탓이었다. 문단 내 입지와 직업인으로서의 능력은 별개였다.
등단한 또래 작가들은 당선 소감을 말하는 인터뷰에서 이구동성으로 등단 후 갈피를 잃었다고 말했다. 당장 나부터도 매년 등단하는 신춘문예 당선자들과 주요 공모전 수상자들의 이름을 거의 알지 못했다. 신진 작가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수상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소설 등단을 하고 대형출판사와 계약을 한 뒤 어떻게든 책이 팔려서 수입이 생긴다고 가정해도 녹록지 않았다. 저작물에 대해 저작자가 발행자로부터 받는 돈을 인세라고 한다. 책 한 권의 정가를 10000원으로 책정하면 통상적으로 작가가 받는 인세는 정가의 10퍼센트인 1000원이다. 이 경우 작가가 인세로 월 200만 원을 벌려면 한 달에 책 2000권이 팔려야 한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2020년 대한민국 성인 연평균 독서량은 7.5권이었다. 2021년에는 4.5권이었다. 문체부는 독서량이 줄어드는 원인으로 각종 콘텐츠의 범람을 꼽았다.
졸업을 앞두고 낙관은 사라졌지만 소설을 쓰면서 살겠다는 의지는 그대로였다. 나는 소설가를 전업으로 삼을 수 있는 터가 마련되기 전까지 소설 쓰기와 병행 가능한 일거리를 찾기로 작심했다. 스물여덟 살이 끝나갈 무렵 시작한 취업 준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