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올려 주세요
중학생 때 만화방에 가 순정만화를 빌려 읽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그중에 하나가 홍자 왕자다. 아쌈,
다즐링, 얼그레이... 알맞은 온도로 물을 끓여 찻잎을 우려내고, 우유나 설탕을 함께 곁들여 호로록 한잔. 그럼 홍차 왕자가 뾰로롱 하고 주인공 앞에 나타나는 그런 만화였는데, 그런 마법같은 이야기로 인해 어린날 나에게는 차 마시기란 굉장히 낭만적인 일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차를 대접해 준 어른들도 같은 생각이셨던 건지 궁금하다. 중학생 때 글짓기 선생님 댁에 가면 가끔 차를 내어 주셨다. 분명히 중학생은 주스나 초코우유를 더 좋아한다는 걸 아셨을 텐데. 선생님은 예쁜 찻잔에 정성스레 메밀차를 따라 주셨다. 숭늉을 마시는 듯한 구수한 맛이었다.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머리를 박고 글을 쓰며 소리 나지 않게 한 모금 두 모금 차를 마셨다. 아 선생님은 얼마나 웃기고 귀여우셨을까. 교복 입은 중학생 넷이서 차를 마시며 글을 쓰는 그 광경이.
선생님이 나에게 메밀차를 소개해 주셨듯 우연히 만난 귀인을 통해 새로운 차의 세계로 인도받을 때가 있다. 네팔에서 온 한 친구는 밀크티의 귀재다. 친구의 나라에서 많이 마시는 밀크티를 우리에게도 끓여주곤 했다. 그 맛이 되게 독특하고 풍부한 게 레시피를 안 받을 수 없었다! 보통 내가 마시는 밀크티는 얼그레이, 잉글리시 브랙퍼스트를 우려낸 거였는데 친구는 카다멈 Cardamom이 들어간 홍차를 쓴다. 찻잎을 넣은 물과 우유를 1:1 비율로 약한 불에 넘치지 않게 끓이고, 기호에 맞게 설탕을 넣어주면 끝. 매일 밀크티를 마신다면 설탕량을 살짝 줄이는 게 덜 질린다. 평일 저녁 공부를 끝내고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우리는 거실 소파에 앉아, 친구는 스토브 앞에서 차를 끓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맛있는 차를 대접하기 위해 물을 끓이는 그 순간이 즐겁고 깊은 대화의 시작이다. 손님들을 집에 대접해 왁자지껄 밥을 먹다가도, 물건을 가져다주러 집에 잠깐 들른 친구에게도 물을 바르르 끓여 차를 우려 주면 후우우. 한 숨 돌리고 느린 템포로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종이컵에 우린 현미녹차는 향도 맛도 이야기도 곱씹을 수 없을 것 처럼 후딱 끝나버릴 시간 같아 싫다. 두 손 가득 채우는 도톰한 사기 잔에 따뜻하게 한 잔 따른다. 입에 잔을 갖다 댈 때 편안한 향기가 증기를 타고 흘렀으면. 그때 마셨던 차의 맛을 내가 기억하는 것처럼 함께 나눈 시간이 좀 더 특별히 기억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