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말고 라벤더 이야기
처음 사귀었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나는 마트에서 그 친구가 즐겨 쓰던 로션을 샀다.
좀 이상하게 들리나? 나름 변명을 하자면 요즘 말로 썸을 탈 때 우리는 기숙학원 같은 반에서 공부를 하는 사이였다. 하루 종일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다 보니 서로가 쓰는 립밤, 로션 같은 걸 자연스럽게 보았고. 마침 둘 다 존슨스 베이비 로션을 쓰고 있었다. 너는 베드타임 나는 핑크. 로션을 맞바꾸자고 한건 그 애였다! 우린 서로의 향을 공유하며 말랑말랑한 관계를 발전시켜 나갔더랬지. 하지만 우리 사이는 그렇게 오래 가질 않았다. 서툴었던 사랑은 끝이 나고 나는 몇 주를 펑펑 울며 그 친구를 생각했다. 그러다 마침 바꿔 쓰던 베드타임 로션이 떨어져 새로 산거다. 절대 절대 그 친구가 보고 싶어 그런 건 아니라니깐.
그런데 집에 와서 뚜껑을 연 순간 그 친구의 향기가 나지를 않는 거다. 진짜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아니 생긴 것도 똑같고 이름도 똑같은데 왜 향이 다른 거지? 알고 보니 기존의 향이 문제가 있어서 단종되고 새로운 향으로 리뉴얼된 거였다. 안 그래도 이별의 아픔을 겪고 있는데 로션 향까지 예전과 같을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프잖아! 그렇게 울며 겨자 먹기로 쓰게 된 라벤더 향 로션을 쓰면서 어느새 나는 그 친구의 향을 잊어버렸다.
두 번째 라벤더와의 조우는 인턴을 할 때였다. 어느 날 티타임을 가지는 걸 좋아하는 친구 캔다스가 새로 산 티를 맛 보여 주었다. 얼그레이인데 라벤더랑 바닐라가 들어있다고 하는데 글쎄. 나는 클래식한 얼그레이가 좋을 것 같은데, 속으로 생각하며 한 입 호로록 마셨더니 세상에! 완전 신세계였다. 몸에 바를 때만 좋은 줄 알았던 라벤더 향이 얼그레이와 어우러지니 묘하고 편안한 맛이었다. 이후로 나는 라벤더가 들어가는 음료는 일단 마시고 보게 되었다. 라벤더를 섞는 시도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 맛의 퀄리티가 어느 정도 보장되기도 했고 새로운 조합이 주는 즐거움도 쏠쏠했다. 기회가 된다면 스타벅스 천호점에서 판매하는 라벤더 브라베를 꼭 드셔 보시라. 브라베(하프 앤 하프로 만든 스팀밀크에 에스프레소가 들어간 커피 음료)와 라벤더의 조합이 사랑스럽다.
얼마 전 퇴근길에 주전부리를 사러 들린 편의점에서 하겐다즈가 출시한 라벤더 블루베리맛 아이스크림을 발견했다. 생각하기에 썩 맛있을 것 같은 조합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라벤더가 주는 즐거움을 알잖아! 가격도 좀 비싸긴 했지만 한 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날 좀 열심히 일했으니까 나에게 상 한번 주지 뭐 하면서.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간단하게 한 스쿱만 먹을 요량으로 자리에 앉아 한 입. 아아 그런데 세상에 이런 맛일 줄은 몰랐잖아. 블루베리 아이스크림은 몇 번 떠먹으면 금세 질리던데 라벤더가 그 맛을 깔끔하게 만들어 주었다. 한 스쿱은 무슨. 몇 스쿱은 더 퍼먹었다.
신기하게도 라벤더는 나에게 항상 '더 좋은 것'이다. 이런 사랑은 다시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던 어린 나에게도. 얼그레이는 기본이 제일이라고 생각했던 대학생 나에게도. 퇴근길 내키지 않게 아이스크림을 집어 든 오늘의 나에게도. 내가 알고 있는 그 맛이 최고라고 생각하면 어김없이 더 좋은걸 선사한다. 그렇지만 이런 맛도 낼 수 있는걸! 하고. 좋다고 생각했던 맛과 향을 보란 듯이 더 좋게 만들어준다. 처음 라벤더를 알게 된 지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새로운 놀람이 있다는 게 꽤 신기한 날이었다. 다음번에는 어떤 즐거움이 있을까? 잘 상상이 안돼서 기대가 되게 한다. 마치 하나님 나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