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8세와 수장령
영국의 왕 중에서 가장 큰 권력을 누렸던
사람이 헨리 8세 입니다. 그가 권력을
다져가는 방법은 여느 독재자와 마찬가지로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이었지요. 왕비 두 명을
처형한 것 뿐 아니라 추기경, 대법관, 수도원장 외 많은 귀족들을
왕에게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했습니다.
헨리8세 출처 픽사베이
살아남은 사람들은 늘 왕의 눈치를 보게 되고,
왕은 승진을 미끼로 그들간에 경쟁을 유도하여
강력한 왕권을 구축해 나갈 수 있는 것이었죠.
토머스 울지 추기경은 헨리8세 치세 초반에
권력의 핵심으로 활약했습니다. 원래 왕실 개인
교사였는데 헨리 8세의 첫번째 총리, 대법관,
외교관 등을 하면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강대국인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를 오가며 줄타기 외교를 잘 해냄으로서
실리를 챙겼습니다. 또한 헨리8세의 여동생
메리 튜더를 프랑스왕 루이12세와 결혼시킴으로서
프랑스와의 동맹을 이루어내기도 했죠.
그런데 대역죄로 처형당했습니다. 첫번째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 허가를 교황으로부터 받아내지
못했다는 책임을 물은 것이었습니다.
토머스 모어 출처 위키피디아
르네상스 시기 대표적인 문학인 유토피아를 쓴
토머스 모어도 대법관의 직위였음에도
처형당합니다. 왕의 이혼을 반대했다는
이유에서였지요. 이처럼 헨리 8세는 자신의
이혼과 결혼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총 985명을
대역죄로 처형했습니다.
이렇게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려면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는 수장령을
발표하였습니다. 로마 교황청에 대해 반기를
들고, 국왕이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 되는
영국국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국왕이 교회의 모든 일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스스로 부여한 것 입니다.
당시 잉글랜드와 웨일즈에는 800여개의
수도원이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출처 픽사베이
수장령을 선포한 후, 왕은 수도원과 성직자
들에 대한 감찰을 명령하고, 교회 토지와
관직에 대한 수입을 조사했습니다.
곧 수도사들의 비리가 수집되었으며
이 내용을 빌미삼아 많은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재산은 국왕에게 귀속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에 찬성했던 유력자들에게
싼 값에 사들일 수 있도록 특혜를 줍니다.
재정을 확보함과 동시에 귀족들의 충성도
이끌어 내는 방법이었죠.
그리하여 영국은 헨리8세 치세에 관료제가
발달하고 강력한 절대왕권이 구축되는
근대국가로 변화해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