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타지넷 왕조 2
헨리 2세는 스티븐과 어머니 마틸다 사이의
19년 간의 내전으로 혼란에 빠진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1154)
그가 빠르게 국가 질서를 잡아가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성직자 토마스 베켓이었습니다.
토마스 베켓은 원래 상인의 아들이었는데
집안이 몰락하여 캔터베리 대주교인 테오발드의
서기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대주교 테오발드는
토마스 베켓이 성직자로서의 자질보다는 행정에
유능하다고 판단하고 헨리 2세에게 추천하였습니다.
헨리2세는 그를 마음에 들어하며 국새 상서에
임명하였습니다. 국새 상서는 옥새를 관리하고
이와 관련된 행정사무를 보는 관직으로
당시에는 최고 법관을 대신하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헨리 2세는 지적이고 우수한 행정능력을 가진
그를 총애하였으며 토마스 베켓도 왕에게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원래 성직자이지만 왕에게 도전하는
신하와 싸우기 위해 병사들을 이끌고
전쟁에 나갈 정도였으니까요.
헨리 2세는 테오발드 대주교가 죽자 베켓을
켄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대주교로서의 직분에 충실한
금욕주의자로 변하여 왕과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유럽은 교회 권력과 세속 권력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서로 권력을 견제하던 시기였습니다.
캔터베리 대성당 내부 출처 픽사베이
헨리 2세와 토마스 베켓이 대립한 문제는
종교재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재판은
세속재판과 종교재판이 있었습니다.
종교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된 성직자는
세속재판에 회부되어 다시 재판을 받게되어
있었습니다. 이 법령은 1164년 헨리 2세가
제정한 클래런던 헌장에 명시된 법률로
왕이 교회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제정했던
법입니다. 토마스 베켓은 이것이 왕의 권력
남용이라고 주장하며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왕에게 반대하는 성직자를 제거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왕은 대단히 불쾌하였고 왕을 추종하는 신하들은
베켓을 위협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프랑스로 추방당하였습니다.
여러 수도원을 전전하던 토마스 베켓은
프랑스의 루이 7세와 교황의 중재로 프랑스에서
헨리 2세와 만나 평화협정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베켓은 다시 켄터베리 대주교로 복귀했지요.
그러나 왕에게 과잉 충성을 바치는 4명의 기사가
켄터베리 대성당으로 몰래 잠입해 들어와 베켓을
잔인하게 살해했습니다 (1170).
토마스 베켓 살해 장면 출처 카톨릭 에듀
영국민들은 왕과 죽은 대주교 사이에서
대부분 대주교의 편을 들었으며 1173년 베켓은
성인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후 300년간 영국민은
캔터베리를 순례하는 것을 특별한 행사로 삼았습니다.
*참고한 책 : 영국사 (앙드레 모루아), 하룻밤에 읽는 영국사 (안병억), 이야기 영국사 (김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