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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시온 Jul 24. 2020

영국의 역사 5

블러디 메리


헨리 8세에 이어 영국의 왕이 된

메리 1세는 많은 신교도들을 처형했기

때문에 피의 메리(블러디 메리)라고

불리웁니다.


'블러디 메리'라는 칵테일이 있는데

메리 1세의 별명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블러디메리 출처 Pixabay


블러디 메리는 헨리 8세와 그의 첫 번째

왕비캐서린 의 딸입니다. 그녀의 불행은

아버지 헨리 8세가 자신의 어머니와의

이혼을 준비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이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로마 카톨릭과 결별하고 영국국교회를

창시했지요. 헨리 8세는 캐서린을

내쫓으면서 그녀의 딸인 메리의,

공주로서의 지위도 빼앗았습니다.

그리하여 갓 태어난이복동생 엘리자베스를

돌보는 시녀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영국국교회와 엘리자베스를 평생 미워할

수 밖에요. 나중에 헨리 8세의 여섯 번째 왕비인

캐서린 파에 의해 공주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메리 1세 출처 Pixabay


자신을 박대하던 아버지 헨리8세가 1547년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녀는 어려운 시절을

더 참아내야 했습니다. 


헨리 8세의 후계자는

세 번째 왕비의 아들인 9살 난 에드워드 6세

였습니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외삼촌인

존 더들리가 섭정을 했습니다. 그는 영국국교회

이외의 모든 종교를 불법화했습니다.


따라서 카톨릭 교도인 메리는 

또 탄압을 견뎌야 했습니다.

어리고 병약한 에드워드 6세가 죽자, 외삼촌

존 더들리는 자신의 아들을 에드워드6세의

사촌인 제인 그레이와 결혼 시켜서제인 그레이를

왕위에 앉히려는 역모를 꾸몄습니다. 지지를

얻지 못하고 9일만에 실패하고 말았지만요.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메리는

주모자인 존 더들리만 처형하도록 했으나,

곧이어 다시 무장 반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관련자들이

처형되기 시작했습니다.


최초로 여왕의 시대를 맞이한 신하들은 어서빨리

결혼하기를 종용했는데 그녀가 택한 신랑감은

스페인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였습니다. 나중에

스페인의 왕이 되는 펠리페 2세입니다.

결혼 당시 메리는 38살, 펠리페는

27살이었습니다. 둘은 영국을 공동 통치 했습니다.


펠리페 2세 출처 Pixabay


부부는 카톨릭 교리를 복원하고 그 이외의

교리는 모두 불법으로 규정했습니다.

메리 여왕이 통치하던 1553 - 1558년 동안

국가와 교회에 반대한 죄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무자비한 숙청으로 메리는

지금까지 피의 여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메리는 후계자를 낳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모두

상상 임신이었습니다. 난소 종양을 임신이라고

착각했던 것이었죠. 그래서 평생을 미워했던

엘리자베스에게 왕위를 물려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후계자 지명을 미루다가 죽기 전 날에야

엘리자베스에게 양위했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출처 Wikimediacommons


메리 1세는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어두운

과거에 의해 인생 전체를 지배 당한 인물입니다.

개인으로서는 참으로 불쌍한 인생을 살았는데

권력자의 위치에 있다보니 개인의 비극에서

끝나지 않고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 시기 유럽에서는 종교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고 같은 신을 믿으면서도 전쟁을 불사했습니다.

현재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죠.

그 시대에는 카톨릭으로 대변되는 구 세력과

프로테스탄트로 대변되는 새로운 세력이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대립했던 것인데 종교라는 외피를

쓰고 자신이 마치 진정으로 신을 대변하는 것 처럼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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