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오늘 담당의사와 마지막 만남을 가졌어.
성급한 판단이라고 만류하며 2주 또
이어서 2주 총 한 달간 생각할 시간을
주었던 그녀는 나의 단호한 한 마디에
더 이상 말이 없었어.
그래도 이정도로 상태가 호전된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하고
진료실 문을 열고 나왔지.
순간, 마치 나를 옥죄이고 있던 철갑옷을
벗어 던진 듯 홀가분했어.
이제 더 이상 주기적으로 겪어야 했던
구역감, 구토, 설사, 변비, 탈모,
두드러기와 가려움증, 기억력 감퇴로
인한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리고 더욱 기쁜 것은 내 운명을 의사의
말 한마디에 걸고 있는 것 같은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이야.
2개월 마다 검사결과를 듣기 위해 진료실
앞에서 가슴조리던 그 순간들.
의사의 그 한 마디에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서로 부둥켜 안기도 하고,
때로는 실망하여 눈물을 그렁거리며
서로를 토닥거렸던 그 때, 내가 얼마나
무기력하고 나약한 존재로 여겨지던지.
평소의 신념과 달리, 항암치료의 수레를 탄
순간부터는 병원에 나를 내맡긴 무력한 환자로
존재할 수 밖에 없었지.
그러한 현실을 박차고 나온 순간,
비로소 대지를 힘차게 밟으며 걷듯이
내게 주어진 길을 순순히 걸어가리라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기분이 좋았어.
항암치료를 했던 것을 후회하는 건 아니야.
언젠가 네게 얘기 했듯 지난 1년은 내게
선물같은 것이었어. 각자 바쁘게 사느라
만날 시간 조차 내기 힘들어서 하마트면
서먹해질 수도 있었던 우리 가족이 지난
1년 만큼 자주 만나고 애틋해진 적은
없었잖아.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때로는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때로는 절규하고, 때로는
애원하면서 고집을 부렸던 너의 모습들은
나를 지극히 사랑하는 이미지로 내 마음 속에
차곡차곡 남아있어. 또 짧은 기간이었지만
세 번씩이나 가족 여행을 갔던 것도,
내가 하고 싶고, 가고 싶고, 갖고 싶었던 것을
최우선으로 모두 들어주었던 너희들과
네 아빠와의 기억들은 나를 외롭지 않게
끝까지 지켜줄거야.
지난 1년은 사랑을 듬뿍 받은 해였어.
몇일 전, 가을비가 하루종일 내린 다음날,
남양성모성지에 다녀왔어. 비가 흠뻑 내린
다음이라서 가을공기가 더욱 청량하게 느껴졌어.
대성당에 들어서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얼굴과 큰 눈이 내 가슴을 멎게 할
만큼 압도적으로 시야를 가득 채웠어.
곧 이어 십자가의 양쪽에 걸린
그림을 보게되었는데 왼쪽은 수태고지,
오른쪽은 최후의 만찬 장면이야.
모두 이탈리아의 조각가 줄리아노 반지의
작품이라고 하는구나.
검색해보니 금년 3월에 94세의 나이로
작고하셨더구나. 이 성당에 남기신 십자가와
그림이 거장의 마지막 작품이 된거지.
90대의 노인이 나무를 깎아서 예수상을 만드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어. 그런데 이 십자가의
예수는 축 늘어진 죽어가는 예수가 아니야.
눈을 부릅뜨고 머리칼을 휘날리는 모습으로
모두를 응시하고 있어.
죽음에 가까운 노인이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나무를 깎아서 사람들의 마음에
전율을 일게하는 작품을 남겼다는 사실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지.
나 또한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것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고통이
오는 순간, 잘 견딜 수 있기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