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의 토지
항암치료를 하던 지난 일 년간
나는 그 어느 때 보다 많은 책을 읽었어.
역사를 가르치는 내 일에 갇혀있어서
이전의 나의 독서는 역사책에 편중되어
있었고 문학의 늪에 푹 빠져버리고 싶은
욕구는 늘 옆으로 밀쳐두곤 했었지.
그런 세월이 오래이다보니, 어느 순간,
놀랍게도 소설읽기가 다른 인문학 서적
읽기 보다 더 어려워지더구나.
그래서 이렇게 많은 시간이 주어진
치료기간에 읽고 싶었던 소설들 위주로
독서를 해 보았어. 책 속에 푹 파묻히는
쾌감을 느껴보고 싶었거든.
그중에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은
박경리의 '토지' 를 완독 했다는 사실이야.
이제 '토지'는 내 인생 최고의 소설이 되어
내 머리 속에 살아 숨쉬는 하나의 세계가
되었어. 다른 책을 읽으면서도 마음 한켠에선
'토지'를 또 읽고 싶다는 욕구가 마치 고향을
그리는 향수처럼 나를 지배하곤 하더구나.
마침내 나는 지난 달부터 '토지'를 다시
읽기 시작했지. 이번엔 네 아빠와 함께
아침 커피를 마시면서 하루에 한 챕터씩
소리내어 읽고 있단다. 다 읽으려면 1년
이상이 걸릴 것 같지만 서둘지 않고
차분하게 징검다리 건너는 마음으로
읽고 있어. 이제는 줄거리를 따라가는데
급급하지 않고, 문장을 음미하고,
작가의 생각을 탐색하면서 읽는
여유가 생겼어.
작가 박경리가 25년 간 쓴 '토지'의
시간적 배경은 1894년 동학농민 운동에서
부터 대한 제국 시기,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이 되는 날까지야. 공간적 배경은
하동 평사리에서 시작하여 통영, 진주, 서울,
북간도, 동경을 넘나들고 그 안에서
600여 명의 인물들이 살아 움직인단다.
그 인물들 중에는 내가 살아온 어느 한 시절에
보았음직한 이들이 있고, 지금 나의 주변인과
비숫한 이들이 있고, 또한 내 인생에서 절대로
만날 가능성이 없는 인물들도 있지.
그래서 '토지'는 인간 세상 그 자체이며
인간이라는 존재의 모든 속성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생각돼.
책을 읽으면서 아름답고, 재치있는 수많은
표현들을 발견하는 것도 크나큰 기쁨이야.
그리고 그런 말들을 잊어버려 더이상
사용하지 않는다는 현실이 참 안타까워.
언젠가 고1 학생을 가르칠 때, "기워입는다"라는
말의 뜻을 모르기에 놀랐던 적이 있어.
요즘은 옷을 기워입는 집이 없으니
그럴만도 하다고 이해했지만, 독서를 했다면
그렇진 않았을텐데. "미쳤어", "대박" 류의
감탄사와 줄임말들을 남용하는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우리말을 살려보려는 노력이
있으면 좋겠어.
언젠가 너희도 토지를 읽으며 어휘의
바다에 푹 빠졌다 나오는 경험을 해 보길
바란다. 책은 엄마의 서가에서 언제든
기다릴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