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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시온 Aug 25. 2024

딸들에게 10

담담한 이별

고교시절, 윗니가 삭아서 와장창 

빠져버리는 꿈을 자주 꾸었어.

윗니가 빠지는 꿈을 꾸면,  윗사람이

돌아가신다는 말을 믿었던 시절이라

그런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어떡하나하는

걱정을 하면서 부엌에서 나는 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우곤 했지.

엄마가 아침을 준비하시느라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곤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곤 했었단다.


아마도 그 시절,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은

엄마가 돌아가시는 일이었던가 본데

그러한 두려움은 결혼 후에도 이어져서

너희 둘을 낳고 기르면서도 엄마가 

돌아가시는 것을 생각하면 한 세상이 

무너질 것같은 막막함이 밀물처럼 

밀려들어 오곤 했단다.


작년, 갑작스런 나의 암 선고 후, 

너희들이  나를 항암치료라는 수레에 싣고 

길고 지리한 터널을 걷기 시작했을 때,

너희들의 심정이 그러한 것이었겠지.

그땐 나 또한, 내가 세상을 떠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이 너희들과 네 아빠가 겪을

비통함이었단다. 


1년 2개월, 24회에 걸친 치료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고, 항암제에 반응도 하지 않는 

오른쪽 폐의 아주 작은 암덩이는 이제 내가 

시한폭탄처럼 안고 살아가야겠어.

암자체보다 항암제에 따르는 부작용으로 

나의 정상적 기관들이 약해지는 것이 더 두렵고,

병약한 몸으로 병원을 드나들며 시간을

보내다가,  늙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미래가 더 두렵기 때문이야.


활동할 수 있고,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오감이 멀쩡한 육체를 갖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데, 그 행운을 고통스러운

치료를 하느라  더이상 소비하고 싶진 않구나.

남은 시간이 얼마가 될진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이 시간들,

그리고 나의 남은 시간 중 가장 젊은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지내고 싶단다.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는 명사수였다지.

매일 아침 50발의 화살을 쏘는데

49발이 명중이고 1발은 일부러 과녁 바깥으로

쏘았다고 해. 자만심을 경계했기 때문이지.

폐에 남은 5mm도 안되는 작은 종양은

정조의 마지막 화살 한 발처럼 느껴져.

내가 건강에 대한 자만심을 갖지 않게 하고

지난 1년간 느꼈던, 세상에 대한 감사함과

겸손함을 망각하지 않도록 하는 

화살처럼 말이야. 


마치 스님이 된 것처럼 음식섭취에 온 신경을

쓰며 종양이 자라지 않도록 노력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양이 자란다면

운명으로 알고 받아들이고 싶어.

다만 이젠 급작스러운 이별이 아니고 담담한 

이별을 준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음을 감사하게  생각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이제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며 가능한 한 즐거운 시간을 많이 갖도록 하자.

엄마의 마음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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