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쾌청한 가을하늘 아래, 느린 속도로 단풍이
물들어가는 11월의 첫 주에 전주 수목원에 다녀왔다.
정문은 공사중이라 임시 진입로로 들어섰다.
수생식물원을 지나, 아직도 색색갈의 화려함을
자랑하며 피어있는 장미꽃밭을 지나, 온실을
구경하고 나오니 그윽하고 서늘한 대나무숲이
나왔다. 속이 비어있고, 하늘로만 향하는
나무라서 일까. 그래서 바람을 많이 품고 있어서
일까. 대나무숲은 유난히 서늘한 것 같다.
숲에 들어서면서, 오래전에 읽었던
김훈의 '숲"이란 단어에 대한 서술이 생각났다.
그 글에 매혹되어 외울 정도로 문장을 반복하여
읽으면서 ㅅ- ㅜ- ㅍ하고 수 십번 소리내었던 적이
있었다. 자음 두 개, 모음 하나로 이루어진
단음절의 단어 하나인데 작가의 집중력 강한
관찰과 절묘한 표현을 읽고 나니 '숲'을 발음할
때 마다 맑고 서늘한 숲 속의 바람이 느껴졌었고
목 젖을 통해 나오는 'ㅜ'모음이 발음 될 때
구강 속 근육의 힘을 처음으로 관찰하게 되었었다.
숲이라고 모국어로 발음하면 입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
자음 'ㅅ'의 날카로움과 'ㅍ'의 서늘함이
목젖의 안쪽을 통과해 나오는 'ㅜ' 모음의 깊이와 부딪쳐서
일어나는 마음의 바람이다. 'ㅅ'과 'ㅍ'은 바람의 잠재태다.
이것이 모음에 실리면 숲 속에서는 바람이 일어나는데,
이때 'ㅅ'의 날카로움은 부드러워지고
'ㅍ'의 서늘함은 'ㅜ' 모음 쪽으로 끌리면서 깊은 울림을 울린다.
김훈의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 중에서
김훈 작가의 '숲'이 청각적이라면,
한강 작가의 '숲'은 시각적이다.
이젠 '숲'이라는 글자가 씌여진 것을
볼 때 마다 탑의 모습을 떠올릴 것 같다.
그후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 적기 시작했다.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 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한강의 "희랍어 시간" 중에서
두 작가의 서술을 통해 '숲'이란 단어는
나의 시각, 청각, 후각, 촉각을 동원하는
특별한 단어가 되었다.
풍부한 표현력을 가진 우리말에서
'숲'과 같은 단어를 찾아 음미하고
적절하게 사용하는 일도 내 남은 생에
큰 의미요 재미가 될 것 같다.
한정된 어휘 구사력으로 글을 쓸 때마다
작은 감방 안을 맴돌 듯 답답함을 느낀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어휘의 부족 때문만은
아니고, 생각의 부족, 공감 능력의 부족,
관찰의 부족, 상상력의 부족 때문이다.
그래서 훌륭한 작가의 글을 음미하고 난
다음엔, 비오는 창 밖의 찻소리도 새삼스럽고,
누렇게 말라가는 잎사귀들 사이에 거미줄을
쳐놓은 채 죽은 거미의 모습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가만히 들여다 보게 된다.
문학적 감수성은 삶을 한층 더 밀도있고
풍요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