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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포도정공장 - 익산여행

조덕현 개인전

by 신시온


익산을 여행하던 중, 일제시대에 지어진

도정공장을 갤러리로 만든 곳이 있다고

하여 들렀다.


갤러리의 이름은 춘포도정공장이고

현재 조덕현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입구에서부터 기존의 갤러리에 대한 상식이

와르르 무너졌다. 공장의 연혁을 살펴보니

1914년 일본인이 설립하였고, 98년에 공장

등록이 취소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관장님은 이 도정 공장을 5년 전

인수하여 3년 전부터 갤러리로 운영하고

있다고 하셨다.


110년의 역사를 지닌 도정공장이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버텨내고 있는 모습인데, 현대 작품의

전시가 그 곳에 숨결을 불어넣고 있는 것 같았다.


1740573373576-15.jpg?type=w1 갤러리의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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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제목이 Horizon 지평이고,

프로젝트 대척지 The Antipodes라는 별도의 제목으로

각 방마다 별개의 작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SE-b4e81cda-fd11-4a15-9837-c08710498688.jpg?type=w1 반투명의 스크린에 비친 앙상한 나뭇가지


작품들과 나 사이에 먼지, 거미줄, 바싹 말라버린

잎사귀들, 녹슨 문, 벽과 지붕의 구멍들 사이로

찬란하게 비쳐드는 햇빛, 그리고 바깥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이 나의 시각, 후각, 촉각에 개입하여

자연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것 같았다.


첫 번째 공간에서는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케 하는

반투명의 실크 천이 공중에 떠있는 모습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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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커다랗고, 반투명하며 부드러운 포물선

안에 서 있으니 안에 있는 듯, 밖에 있는 듯 경계가

모호했다.


끝과 시작, 죽음과 생명이 구분되지 않는

영원성의 표현일까. 전시를 다 마치고

생각해 보니 그러한 주제를 일관되게

표현하고 있는 작품들인 것 같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골방에 설치된

대척지 프로젝트 3번째 작업이었다.

이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는

30년 전 작가가 브라질에서 만난

다구치라는 일본인의 사연 때문이다.


초상화와 바늘 없는 시계를 처음 보았을 때의

내 감정은 밋밋했었다. 그러나 이 사연을 읽고

나서 다시 보았을 때 그 슬픈 이야기가 덧씌워져

그의 과거가 현재의 내 가슴을 촉촉히 적셔

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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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들려준 가슴아픈 이야기가 되살아나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

어린 다구치의 자랑스런 누나. 꽃처럼 눈부시던

그 누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어지지 못한 슬픔에 겨워

그만 병원 문턱에서 세상을 떠났다 했네


그러면서 그는 어두운 골방 속

영원히 시간이 정지된 괘종시계를 내게 보여주었지

그 시계는누나가 세상을 떠나던 그때 어린 다구치가

울면서 시계바늘을 뜯고 시간을 멈추었다고 했지


누나가 운명하던 바로 그 시각에 라디오에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사망했다는 속보가 흘러

나왔고 다구치씨는 감당할 수 없는 운명에 밀려

대척지로 왔다고 했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 끌려가 전쟁에 나섰...

조선 청년 조문상을 생각....


어느 죽음인들 슬프지 않으랴


아트 해즈 노 보다 art has no border

다구치씨는 더듬거리는 영어로 내게 말했고

나는 그 말에 진심으로 동의하였네

대척지에서


세월이 흘러 내 나이

그때 다구치씨의 나이를 웃도는 지금

그 말은 이곳에서 유효한가

혹은 아닌가


춘포 도정공장 뒤뜰 느닷없는 관음보살은

시공의 뒤틀림 속에 대척지로부터 갓 당도한

다구치씨의 전갈인가

혹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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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초상화는 다구치씨의 누나이다. 작가가 다구치씨로 부터 받은 사진을 보고 연필로 그린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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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놀라운 설치 작품은 삼면의 벽을

채운 한 사람의 일기였다. 일기를 쓴 사람은

1906년 생인 이춘기라는 실존 인물로

이 지역에서 과수원을 운영하셨는데

30년 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쓰셨다 한다.


일제시대와 해방, 전쟁 같은 우리 민족의

비극을 오롯이 겪으셨던 분이 어떤 일기를

쓰셨을지 무척 궁금하여 몇 장을 찍어와서

어렵게 읽어 보았다. 현시점에 대한

비판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인간에 대한 고민과 통찰을 담고 있었다.

장마다 그려 넣으신 삽화 또한 현대적이다.


1740573339120-9.jpg?type=w1 일기의 페이지마다 윗부분에 그림을 그려넣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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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을 마치고 갤러리의 외부를 한 바퀴 돌아 보았다.

관리하기가 만만치 않을 이 특이하고 넓은 갤러리가

오래 유지 되기를 바라며,

이 독특한 전시회를 찾는 발길 또한 많아 지길 바란다.


전시회는 25년 4월 24일 까지 계속 된다.


1740573373576-18.jpg?type=w1 갤러리를 밖에서 찍은 모습
1740573373576-23.jpg?type=w1 갤러리의 뒷편 벽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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