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쿠스 형제
그라쿠스 형제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외손자이며,
포에니 전쟁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로마의
문제점을 개혁하려다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입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명문가의 자제로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까지
집정관을 지냈으며 스키피오도 30 세에
집정관에 선출되었습니다. 그리고 2차 포에니
전쟁의 자마전투를 승리로 이끈 로마의
영웅이었지요. 이 전투의 패배로 카르타고는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금의환향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후, 로마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으며 15년간 원로원의 제1인자인
프린켑스를 지냈습니다.
그가 나이가 들고 쇠약해지자 정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정적들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형 루키우스가
공금을 횡령했다고 고발을 했습니다.
고발자들의 진짜 목표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였습니다.
고발자들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3번이나 로마 법정에 세웠습니다.
그들은 17년 전의 일까지 들추어 내며,
스키피오가 월권행위를 했다느니, 적과
내통했다느니 하는 의혹들을 쏟아내었습니다.
고발자들은 이렇게 무차별적인 의혹들을
퍼부으면서 대중의 관심을 끌고,
대중 앞에서 망신을 주며,
스키피오의 지지자들 마저 침묵하게하려 한 것입니다.
개인의 안위보다 로마를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아온 스키피오의 도덕심은 크게 상처를
입었습니다. 명예를 중시 여기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는 자발적으로 정계은퇴를 선언 했으며
어느 이름없는 마을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로마 영토안에 있는
스키피오 가문의 묘지에 매장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의 무죄가 증명된 것은
죽은지 2년 뒤 였습니다.
배은 망덕한 조국이여
그대는 내 뼈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외손자인
그라쿠스 형제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형제가 살던 시기는, 3차 포에니 전쟁과
그 이후입니다. 로마가 지중해를 가운데에
둔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었던 때이지요.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늘어난 속주에서 갖가지 농작물이 유입되었고,
귀족들은 대농장을 소유하였습니다.
대농장은 노예노동을 기반으로 운영되었는데
이것을 라티푼디움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영농은 몰락하고
무산자 (프롤레타리아트)가 되어 로마로
몰려 들게 되었습니다. 즉, 부가 일부
소수에게 편중되고 중산층이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죠.
이는 병력의 약화도 초래했습니다. 병역은
무산자에게는 부과되지 않기 때문이었어요.
출처 픽사베이
기원전 134년 호민관에 당선된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이러한 상황을
개혁하기 위해 농지 개혁법안을 제출하였습니다.
주요 내용은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두고,
그 이외의 토지는 자영농에게 분배하여
중산층을 구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법안을 통과 시키고,
호민관의 임기가 끝나 재선에 도전했습니다.
반대파들을 관례적으로 재선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독재자라고 비난하며
당선을 막으려 했습니다.
호민관 선거날, 반대파들은 철제 곤봉으로 무장하고
그라쿠스와 그 지지자들을 무차별 학살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시체는 티베르 강가에 버렸습니다.
형이 죽은지 10년이 흐른 기원전 123년,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에 당선되었습니다.
형이 하려던농지 개혁법을 추진하여
자영농을 구제하고,
곡물법을 제정하여 국가가 곡식을 싼값으로
빈민에게 제공하고, 또 시민권 개혁법으로
로마 시민권의 확대를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수적인 원로원 세력은 크게 반발하여
긴장이 고조되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그라쿠스 지지자가 한 하급 관리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를 빌미로
원로원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그라쿠스파를 진압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학살당했고 가이우스도 도망치다가
자살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참수되었고
티베르강에 던져졌습니다. 로마를 건강하게
만들려던 개혁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문제는 안에서 곪아가고 있었습니다.
형제의 개혁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