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두정치
그라쿠스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후,
거대한 제국 로마는 겉으로는 풍요했지만
내외부적으로 여러가지 문제가 곪아가고 있었습니다.
소수 귀족의 라티푼디움 경영과 그에 따른 자영농의
몰락은 군사력의 약화로 이어졌습니다.
무산자가 된 자영농들은 로마로 몰려들었습니다.
원로원은 평민들의 지지를 받는 민중파와 귀족세력이
지지하는 벌족파가 정쟁에 몰두하여 공화정의
한계를 보여주었습니다.
여러 속주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확대된 국경선에서는
끊임없는 외침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민중파였던
장군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무산시민들로 구성된
지원병을 모집하여 군대를 편성했습니다.
이 군대는 무기와 봉급을 제공 받았으며
퇴역하면 퇴직금까지 받았습니다. 이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마리우스에 대한
충성심으로 바꾸어 갔으며, 이에 힘입어
마리우스는 일곱차례나 연속해서 집정관이
되었습니다. 공화정의 전통이 깨어지고
군사독재를 향해가고 있었던 것이죠.
한때 마리우스의 부하였던 술라는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마리우스를 밀어내었습니다.
그리고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스스로 종신독재관에 취임하여
공포정치를 했습니다. 1만여명의 친위대를
거느리고 막대한 부를 소유했으며 원로원 의원들도
마음대로 임명했습니다. 이로써 공화정의
전통은 사라져가고 있었죠.
술라가 죽은 후,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사람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입니다.
크라수스는 술라의 공포정치 때, 숙청된 사람들의
재산을 사들여 로마 최대의 부자가 된 사람입니다,
폼페이우스는 술라의 부하로서 젊은 나이에
탁월한 군사력을 과시한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로마 역사상 최대의 노예 반란인
스파르타쿠스의 난을 진압한 후, 정치적으로
도약하였습니다.
검투사 출처 픽사베이
스파르타쿠스의 난은 기원전 73년,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서 74명의 검투사가 탈출하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점차 노예들이 가세하여
1년 뒤 반란 세력은 6만여명으로 불어났습니다.
반란의 지도자 스파르타쿠스는 속주인 트라키아
(지금의 불가리아) 출신 노예였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은 이렇게 각지에서 잡혀온
다양한 이민족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하는
강열한 열망을 품고 남부 이탈리아 를 장악했습니다.
검투사 출처 픽사베이
그들은 2년에 걸쳐 로마군과 싸웠는데
크라수스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6천여명이
아피아가도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졌습니다.
폼페이우스는 에스파냐에서 귀환하던 중,
도망가던 노예들을 사정없이 제거 하였습니다.
이후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노예반란을
진압한 공을 서로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싸웠으며 각자의 야망을 위해 경쟁하면서
세력을 키웠습니다.
크라수스는 자신의 부를 이용하여 원로원
의원들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으며
폼페이우스는 전쟁을 연이어 승리로 이끌면서
입지를 다졌습니다.
두 사람의 치열한 갈등과 원로원의 견제
사이에 율리우스 카이사르 (줄리어스 시저)가
끼어들었습니다. 그는 두 사람을 따로 만나
서로의 이익을 위해 협상하도록 설득하고
자신을 집정관에 선출되도록 하면, 두사람이
원하는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도록 돕겠다고
설득했습니다.
줄리어스 시저 출처 픽사베이
이로서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세 사람이 집정관이 되는 1차 삼두정치의
시대가 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