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에니 전쟁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로마가
눈을 돌린 곳은 지중해 서쪽이었습니다.
기원전 3세기 무렵 지중해 동부는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의 헬레니즘
세계였으므로 신흥국 로마가 진출하기엔
부담스러운 곳이었어요.
반면 서지중해는카르타고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9세기에
페니키아의 식민도시로 출발했습니다.
수 백년이 지난 후, 페니키아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본국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독자적인 세력을 펼칠수 있었지요.
당시 카르타고는 에스파냐와 코르시카,
사르데냐, 북아프리카 등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인을 포에니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카르타고와 로마의 전쟁을 포에니
전쟁이라고 합니다.
두 강대국의 충돌은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
반도의 앞 부분에 돌맹이처럼 위치한
시칠리아 섬에서 시작합니다.
당시 시칠리아엔 메시나와 시라쿠사가
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시라쿠사가 카르타고를 끌어들여 메시나를
공격하자 메시나는 로마측에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이로서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차 포에니 전쟁은 시칠리아를 무대로
전개되었는데 기원전 264 - 241년 까지
20여 년에 걸쳐 전개되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로마는 예기치 못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중장보병 위주의 군대를 가진
신흥국 로마가 해상강국과의 해전에서
승리를 한것이죠. 로마는 시칠리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해외
식민지를 갖게 된 것이었어요.
게다가 강화조건에는 카르타고가 배상금을
10년 간 분할하여 지불한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카르타고의 군대는 대부분 용병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전쟁 후 재정 압박에 시달리던
카르타고 정부는 용병의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게다가 차별대우를 받고 있던
피지배민족들까지 반란에 합세하였습니다.
카르타고의 총사령관 하밀카르는 반란을
무력진압했습니다. 그러나 이 혼란을 틈타
로마는 사르데냐와 코르시카섬까지
접수하게 되었습니다.
반란을 진압한 하밀카르는 에스파냐로 갔습니다.
카르타고의 식민지 에스파냐는 카르타고의
거대한 시장이자, 광산이 곳곳에 있었으며
용병들을 구할 수 있는 곳이었어요.
당시 카르타고는 에스파냐의 남해안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하밀카르는 영역을
더 확장하고 개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전사하였고
사위가 총독직을 이어받았으나 5년만에
또 암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뒤를 이은 사람이 하밀카르의 아들
한니발이었습니다. 한니발이 어린아이였을 때
아버지 하밀카르는 아들을 신전으로 데려가
'평생 로마를 적으로 삼을 것'을
서약시켰다고 합니다.
한니발 장군 출처 위키피디아
2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18- 기원전 202년)은
한니발이 수행했습니다.
그는 수 만의 군대와 수 십마리의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육로를 통한 로마 원정을 시작했습니다.
출처 위키피디아
두 개의 산맥, 즉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어야하는 험난한 원정길에서 많은
군사와 코끼리들이 목숨을 잃었지요.
그러나 알프스 산맥을 넘는 길에 로마와
적대적 관계에 있던 갈리아인 용병들을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한니발은 로마군을 무찌르며, 로마군이 건설해
놓은 도로를 따라 남진한 끝에 이탈리아
남부의 칸나이에서 로마군과 격돌하게 되었습니다.
아피아가도 출처 위키피디아
병력면에서 로마군이 훨씬 많았으나 한니발의
초승달 포진이라는 탁월한 전술에 휘말려
로마의 중장보병으로 이루어진 밀집대형은
포위되었고 로마군은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한니발은 아직 로마를 정복하지 못한 채 ,
로마의 동맹국들을 회유하면서
로마군과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로마를 구할 영웅이 등장 했습니다.
20대 젊은 나이의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초승달 포진을 모방하여 에스파냐를 정복하고
카르타고 본토를 공략하였지요.
이탈리아 반도 남쪽에 고립되어 있던 한니발은
카르타고를 구하러 돌아왔습니다.
그리하여 기원전 202년 한니발과 스키피오가
카르타고의 자마 평원에서 결전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스키피오에 비해 기병이 절반 밖에 안되었던
한니발은 코끼리 부대까지 동원했지만
참패하고 말았습니다. 로마 원로원은
개선장군 스키피오에게 아프리카를 제압한 자라는
뜻으로 아프리카누스라는 존칭으로 불렀습니다.
이후 15년간 원로원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영향력은 막강했습니다.
자마 전투후, 평화조약이라는 이름으로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무장해제 할 것, 다른 나라와의
전쟁을 금지할 것,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치를 것 등을 요구했지요.
다른 나라와의 전쟁을 금지할 것이라는 조항은
카르타고를 옭아매는 그물과도 같았습니다.
카르타고 옆에 위치한 누미디아 왕국이
카르타고를 향해서 세력 팽창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카르타고는 당연히 방어를
해야했는데 로마는 이것을 핑계로
3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149 - 146년)을
일으켰습니다. 카르타고의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카르타고를 폐허로 만들고 주민을
완전히 축출했습니다.
카르타고 역사 유적지 출처 픽사베이
이제 로마는 카르타고의 지배영역을 모두
접수하고 동쪽 그리스, 마케도니아, 시리아 까지
진출하여 지중해를 가운데 둔 드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