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민의 권리신장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에,
로마에서는 여러차례 법제정을 통하여
평민들의 권리가 신장되어 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권을 독점하려는 귀족들과의 계급갈등은
평민들이 로마시에서 철수함으로서
극적인 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평민들은 로마 북동쪽에 있는 몬스사케르
(Mons Sarcer 성산이라는 뜻)에 올라가
새로운 도시를 세우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을 성산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건으로 명실상부한 평민회와 평민의
대표인 호민관이라는 관직을 얻어내었지요.
평민의 요구를 대변하는 호민관은 법률을
발의 할 수 있었고,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어서
행정, 사법, 군사분야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칠수가 있었어요. 이를 바탕으로
로마 최초의 성문법 12표법을 제정할 수
있었습니다. 12표법은 2년간의 논의 끝에
기원전 449년에 채택되어 청동판에 새겨서
광장에 공시되었습니다.
이젠 귀족들이 관습에 따라 알아서
법을 집행하던 관행이 없어진 것입니다.
로마의 청소년들은 12표법의 조항들을
외우고 다녔다고 합니다.
기원전 367년에는 리키니우스법을제정하여
두 명의 집정관 중 한 자리를
평민이 차지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고위 관직도 평민에게 개방하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287년에는 평민들이 다시 로마에서
철수하는 사건을 일으킵니다. 이로써 제정된
호르텐시우스법으로 평민회의 결정을
그대로 법으로 시행하게 됨으로서, 원로원의
승인없이 입법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귀족이란 명예로운 혈통을 가졌을 뿐, 권리에
있어선 평민과 별다를 바가 없어진 것이었어요.
평민들이 이렇게 철수까지 감행하면서
권리를 요구한 데에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크고
작은 전쟁에서 평민들이 중장보병으로 참여하여
큰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입니다.
로마 중장보병 출처 픽사베이
로마는 영토 확장을 위해 여러 나라들과
동맹을 맺는 방법을 쓰고
동등한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했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라틴 동맹이라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지역과는 전쟁을 해야했습니다.
북부 이탈리아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갈리아인과
전쟁을 해야했고, 라틴동맹을 견제하는
삼니움 동맹과의 전쟁, 또 로마에 불만을 품은
동맹시들과의 전쟁 등 많은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때 마다 평민으로 구성된 중장보병의 밀집 대형
전술은 승리의 큰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런 만큼 평민들도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었죠. 귀족들도 평민의 협조가 절실한
것이었기에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내부적 갈등으로
인한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 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원로원의 귀족정, 평민회의 민주정, 집정관의
왕정이 어우러져 조화로운 정치 형태를 갖춘
로마는 결국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지중해 출처 픽사베이
이제 로마는 바다로 눈을 돌릴 차례입니다.
지중해 서쪽과 북아프리카는 카르타고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카르타고와의
대결이 불가피하겠지요. 카르타고와 로마의
충돌을 포에니 전쟁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