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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시온 Sep 02. 2020

로마의 역사 2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로마의 왕정은 기원전 753년 - 기원전 509년까지

이어졌고 7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가 쓴 '로마사'에 따르면,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는 자신이 건설한

국가에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주변의 다른 국가들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를 마련하고

그들을 불러들였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주변국의 범죄자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로물루스는 자유민이든 노예이든 상관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범죄자들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지요.


로물루스는 법령을 선포했고, 100명의 원로를

선임하여 원로원을 구성하였습니다.


원로원 출처 위키피디아


그런데 문제는 범법자들로 출발한

나라이다 보니 여자들이 절대 부족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야비한 방법을 생각해내었습니다.

이웃 부족 사비니 족을 축제에 초대한 후,

흥이 무르익어 긴장이 풀릴 무렵, 무력으로

사비니 족의 남녀를 분리시키고 여인들을

납치했습니다. 이 일로, 로마와 사비니족은

몇 년간 전쟁을 하게 되었죠.


그런데 결전을 앞둔 순간, 납치되었던 사비니의

여인들이 나타나 필사적으로 전쟁을 막아섰습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사비니 여인의 중재


그 여인들은 이미 로마인 남편과의

사이에 아이들을 낳은 후 였기 때문이었죠.

그리하여 로마와 사비니족은 무기를 내려놓고

평화협정을 맺게 되었습니다.


평화협정은 로물루스와 사비니의 왕이

공동왕을 하고, 원로원에 사비니 족

출신 100명을 추가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로써 로마와 사비니는 합병이 되었고

좀더 크고 강력한 국가가 되었지요.


이후 다른 이웃 부족들을 하나씩 합병하였는데

특이한 것은 정복한 부족에게 자신들과 동등한

권리와 자유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을 이러한 개방적인 통합정책에 있었다고

역사가들은 평가를 합니다.


후대의 왕들이 사비니 족 출신이라거나

에트루리아 계 출신이라는 점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개방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피아가도 출처 위키피디아



왕정은 7대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폭정으로 끝이 납니다.


그의 아버지는 5대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였는데 아들이 아닌

사위 세르비우스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6대왕 세르비우스는 그것이 미안했는지,

아니면 후일의 화근을 없애려했는지

자신의 두 딸을 5대왕 타르퀴니우스의

두 아들과 각각 결혼시킵니다.


6대왕 세르비우스의 두 딸 중,

작은 딸 툴리아는 강한 권력욕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자신의 남편이 권력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남편과 언니를

죽이고 형부와 결혼을 합니다.

그 형부가 7대왕이 되는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입니다. 새로 부부가 된 두 사람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권력욕의 화신 툴리아는 형부이자 남편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왕이 되도록

재촉합니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원로원에서 세르비우스를 강력히 비난하고,

끝내 자객을 시켜 길거리에서 살해를 합니다.

이때 마차를 탄 딸 툴리아가 나타나 아직 숨이

붙어 있는채 쓰러져 있는 자신의 아버지

세르비우스 위로 지나갔습니다.


6대왕 세르비우스는 이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패륜적이며 폭력적인 방법으로 왕이 된

7대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폭정을 일삼았습니다.

수페르부스라는 이름의 뜻은 오만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대규모 토목공사에 시민들을

강제 동원하고 주변국가들을 공격하여

로마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 넣었습니다.

폭정에 지친 시민들의 불만은 

날로 커져가고 있었지요.


그즈음 왕의 아들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

큰 사건을 일으킵니다. 사촌의 부인인

루크레티아를 범하였는데, 루크레티아

모멸감을 이기지 못하고 남편과 친정아버지에게

복수해 줄것을 간청하며 

그들 앞에서 자결하였습니다.


이에 루크레티아의 친정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남편의 친구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시민들 앞에서 연설을 하며

반란을 일으킵니다. 노역에 시달려 불만이

쌓여 있던 시민들이 적극 호응 했으며

그가 얼마나 폭력적인 방법으로 왕이

되었는지 상기 했습니다. 전쟁터에 나가 있던

왕이 반란소식을 듣고 달려오지만,

시민들이 성문을 굳게 닫고 왕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결국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에트루리아로 도망갈 수 밖에 없었지요.


반란을 주도한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이제 어느 누구도 왕의 통치로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왕의 간청이나 뇌물에 의해서도

이 새로운 자유는 번복 될 수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제 왕정이 끝나고 새로운 정치 체제인 공화정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공화정은 왕이 없고

여러사람이 합의하여 대표를 뽑아

 정치를 하는 것입니다.


기원전 509년 , 원로원에서는 처음으로 콘술

즉, 집정관을 선출하였습니다.

집정관은 독재를 방지하기 위해

두 명을 뽑고, 임기는 1년으로 정했습니다.

두 명의 집정관 중의 한 명이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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