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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시온 Sep 16. 2020

로마의 역사 10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콤모두스는 사치스럽고, 방탕했으며,

공포정치로 일관하다가 친위대장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이후 로마는 급속도로 힘을 잃어갔습니다.

235년부터 284년까지 50년 동안에는

무려 26명의 황제가 있었습니다.


내부의 혼란에 더하여 외부의 정세도

급속도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동쪽 국경선에서는 수 백년 동안 로마에 대항하던

파르티아가 226년 멸망했는데, 더 강력한

사산조 페르시아가 부상했습니다.


또 북쪽에는 고트족이 소아시아 북부까지

점령하여 로마 제국의 중요한 육로를

봉쇄하였습니다. 속주들은 저마다

독립을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위기를 잠시나마 극복할 수 있도록

노력한 두 명의 황제가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입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재위 284 - 305)는

제국을 동방과 서방으로 나누고 각각 황제,

부황제를 두어 4명의 황제가 분할 통치하도록

하였습니다. 자신은 동방의 황제가 되었고

자신이 최고 권력자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는 무너져가는 로마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여러가지 개혁을 실시하고 

황제중심의 전제정치를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트교를 강력하게 탄압하였습니다. 

그러다가 305년 홀연히 정계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고향인 달마티아의 해변에 궁전을 짓고

은거했는데 그곳은 지금의 크로아티아 스플리트입니다.


스플리트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여행 중 찍은 사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대기하던 곳. 동그란 하늘이 보인다.


스플리트의  궁전 앞 리바거리



그가 은퇴하자 서방의 황제 막시미아누스도

은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부황제였던 동방의

갈레리우스와 서방의 부황제 콘스탄티우스가

정황제가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는데

이후, 후계자를 정하는 과정에서 권력 다툼이 생겨났습니다.


권력 투쟁의 중심이 된 사람은 콘스탄티누스입니다.

그는 콘스탄티우스의 아들로서 아버지가

브리타니아 원정에서 사망하자 휘하 병사들과

갈리아 여러 속주의 총독들에 의해 서방의

정황제로 추대되었습니다. 동방의 정황제가 된

갈레리우스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별도로

서방의 정황제와 부황제를 임명했습니다.


이로서 콘스탄티누스와 서방의 정황제가 된

막센티우스와의 권력 투쟁은 불가피 해졌습니다.

311년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서 서방정황제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뒤이어 새롭게 동방의 정황제가 된 리키니우스마저

제거하고 40년 만에 다시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에 오릅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황제 출처 위키미디어


그는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지었습니다.


출처 commons wikimedia


이곳은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입니다.

그는 전제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으며

밀라노 칙령을 내려 크리스트교를 공인했습니다. 

그는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를 앞둔 어느날 

하늘에 크리스트교의 표식이 나타났고 

그 표식으로 나가 싸우면 이길 것이라는 

글자를 보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실인지 따질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미 로마제국에 널리 퍼져있는

크리스트교라는 신흥세력에 의지 하여

승리를 꾀한 것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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