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왕조의 시작
카롤루스 대제가 죽은 후, 제국을 통솔하는
강력한 군주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프랑크 왕국은 베르됭조약과
메르센 조약으로 분할된 후에도,
더 작게 쪼개져 여러 왕국들이 생겼습니다.
9세기에 서유럽은 북쪽으로부터 바이킹의
침략이 극심했고, 남쪽에서는 이슬람이
침략해 왔습니다. 농민들은 마을의
유력자에게 강도와 해적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 대가는
납세와 부역이었지요.
각 지방의 유력자들은 침략자에 대항해
적으로 부터 자신의 땅을 방어하는데
협조하는 신하들에게 토지를 나눠주었지요.
그 신하들도 자기 나름대로 부하인 기사를 두고
있었으므로 그들에게도 토지로 보상했습니다.
이렇게 약자가 강자의 보호 밑으로
들어가면서 서로간의 의무를 다하는
봉건제도는 서서히 서유럽 전체로 퍼져나가
중세 유럽의 질서가 되었습니다.
아키텐의 성 출처 픽사베이
각 지방의 영주는 자신의 성안에서 왕처럼
군림했는데, 카롤링거왕조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자 국가의 모든 기능은
지방의 영주들에게 넘어가고 왕은 자신의
개인 영지만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카롤링거 왕조가 약해져 교회를 보호할 수 없음을
알게 된 프랑스의 성직자들은
다른 가문을 지지하기로 했습니다.
지방 영주들 중에서 로베르가문은 센 강과
루아르 강 사이에 있는 프랑스의 심장부를
장악한 대영주였습니다. 그들의 영지는
카롤링거 왕보다 넓었지요.
출처 위키미디어
987년 프랑스의 영주들은 로베르 가문의
위그 카페 (Hugues Capet)를 새로운 왕으로
선출했고 교회는 이 결정을 지지하였습니다.
프랑크의 카페왕조가 시작된 것이죠.
초기 카페 왕조는 그다지 권위를 부리지
못했습니다. 비등한 세력의 영주들에 의해 선출된
왕이기 때문이었지요. 위그 카페는 이러한 점을
염려하여 아들 로베르 르 피유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플랑드르 백작의 미망인과
강제로 정략결혼을 시켰습니다.
로베르는 사촌 베르타를 이미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곧 이혼을 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교황이 첫 부인과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아
결국 왕이 굴복했다는 일화로 미루어 보아
초기의 카페 왕조는 여러 강력한 영주들 사이의
대표 정도의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