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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시온 Oct 06. 2020

프랑스의 역사 3

카롤루스 대제


카를 마르텔과 피핀으로 이어지는 카롤링거 왕조는

카롤루스 대제 때 활짝 꽃을 피웠습니다.


카롤루스의 이름은 지역에 따라 달리 불리웁니다.

카롤루스는 라틴어인데, 독일어로는 카를 (Karl),

프랑스어로는 샤를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샤를에 존칭인 마뉴를 붙여서

샤를마뉴대제라고 합니다.


카롤루스 대제는 아버지 피핀에게서 프랑크 왕국과

로마카톨릭과의 돈독한 관계를 물려 받았습니다.

게다가 활발한 정복 전쟁을 하여 프랑크왕국의 

최대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부 이탈리아를

완전히 장악했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슬람에게서

카탈루냐를 빼앗았지요. 이때 후방부대와 조카인

롤랑을 잃었습니다. 이 사건은 서사시 

롤랑의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카롤루스 대제 출처 픽사베이



그는 오늘날의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에스파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정복지 마다 교회를 세우고 주민들이 

카톨릭으로 개종하도록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교황령을 더욱 확대하여 이탈리아 중부 전역을 

교황에게 기증하였습니다.


800년 12월 25일 교황 레오 3세는 로마의 성탄절

미사에 참석한 카롤루스 대제에게 로마황제의 관을

씌워주었습니다. 서로마는 이미 멸망했고,

로마의 정통성은 비잔티움 황제가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지만, 교황은 카롤루스가 로마의 상속자라는

자격을 부여하는 상징적인 행위를 한 것이었습니다.

또 동시에 교황이 황제를 임명할 권리를 

확보하려는 의도이기도 했지요.



카롤루스는 문화군주이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많이

배우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고 학문과 예술을

무척 존중했습니다. 그는 침대 머리 맡에 서판을

넣어두고 글씨 연습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카롤루스 대제의 옥좌 출처 픽사베이


그는 직접 칙령을 내려 각 주교구와 수도원에

학교들을 설립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영국 신학자 앨퀸을 초빙하여 궁정학교를

세웠습니다. 그곳에서 옛문서를 필사하게 하고

라틴어와 라틴 문학, 논리학, 수학, 고전 등의

학문과 음악, 시등의 예술을 적극 장려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가리켜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부릅니다.


그가 죽은 후, 왕국이 빠르게 쇠퇴해 갔습니다.

남쪽에선 이슬람의 침입, 북쪽에선 바이킹의 침입이

시작되었습니다. 또 내부에선 분열이 계속되었습니다.


카롤루스의 셋째 아들로 제위를 이은 루이 1세는

삼 형제를 두었는데 서로 격렬하게 싸운 후,

843년 유럽 최초의 조약인 베르됭 조약을

통해 왕국을 3분할 했습니다.


베르됭조약 출처 위키미디어


이후 중프랑크를 차지했던 로타르가 죽고

그의 세 아들에 의해 중프랑크가 다시

3분할 되자, 서프랑크와 동프랑크를

차지했던 로타르의 두 형제가 양쪽에서

중프랑크를 잠식해 들어갔지요.


결국 형제는 메르센 조약 (870)을 맺고

라인강을 경계로 중프랑크를 다시 분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서 프랑크는

프랑스로 이어지게 되고 동프랑크는

독일지역이 되었습니다. 즉, 프랑스와 독일은

프랑크 왕국에서 분리되어 나온 것입니다.



메르센조약 출처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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