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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시온 Oct 09. 2020

프랑스의 역사 6

필리프 4세, 아비뇽유수


필리프 3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필리프 4세

카페왕조의 왕 중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왕입니다. 또한 외모가 출중하여

미남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립니다.


할아버지인 루이 9세는 내치와 외치에 성공한

명군으로 평가 받아 성 루이라는 칭호를 받았지요.

아버지인 필리프 3세는 툴루즈와 푸아티에에

국부적으로 남아있는 영국령을 하나씩

접수하였습니다.



이렇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다져놓은 왕권을

기반으로, 그는 우선 영토확장에 나섰습니다.

플랑드르와 아키텐의 영유권을 놓고 영국의

에드워드 1세와의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전쟁비용이 부족해지자 프랑스 교회와

성직자에게 과세하는 정책으로 재정난을

극복하려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황과 충돌하는

결정적 사건이 되었지요.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세속군주가 교회나

성직자에게 세금을 징수할 수 없다는 칙서를

내리고 필리프 4세를 파문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필리프 4세는 굴복하지 않고 화폐의 국외

반출을 금지했습니다. 그러자 수입이 차단된

교황은 한 발 물러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교황과

충돌하였습니다.


마침내 1303년 자신의 측근인 기욤 드 노가레

보내서 교황에게 사퇴하라고 압박하였습니다.

교황이 거부하자 노가레는 교황을 납치하여

아나니에 있는 교황의 별장에 가두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교황은 뺨을 맞고 폭행을 당했습니다.

교황은 가까스로 구출되긴 했으나 그 충격으로

한 달만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1305년 필리프 4세는 프랑스인인 클레멘스 5세

교황으로 세우고 1309년에는 교황청 마저

프로방스의 아비뇽으로 옮겼습니다.



아비뇽의 교황청 출처 픽사베이


이 사건을 아비뇽유수라고 합니다. 이후

프랑스 왕의 세력에 굴복한 교황들은 1309년에서

1377년까지 아비뇽에서 살았습니다.

1377년 교황은 로마로 돌아갔지만 이후에도

아비뇽과 로마에서 각각 교황을 선출하여

크리스트교권은 두 개로 분열되었습니다.


교황과의 분쟁시기에 필리프 4세는 최초로 의회를

소집하였습니다. 성직자, 귀족, 도시의 대표들이

모인 신분제 의회인 삼부회는 1302년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개최되었습니다. 목적은 교황권과의

분쟁에서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토론이나 제안은 없고 일방적인 연설을

듣고 승인하는 형식이었지요.


필리프 4세 시대에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사건은 성전 기사단해체입니다.

성전기사단은 십자군 전쟁 시기에 성지

수호와 순례자들의 보호를 위해 창설되었습니다.

흰바탕에 붉은 십자가를 붙힌 제복을 입었지요.


성전기사단 유니폼 출처 픽사베이


성전 기사단은 십자군 전쟁기간동안 기부와

대부업으로 막대한 재산을 모았으며

국제적인 조직을 갖고 있었습니다.

여러 지방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고

여러가지 사업을 경영하여 기사단은

국왕에게도 자금을 빌려줄 정도였지요.

필리프 4세 또한 이들에게 빚이 있었습니다.


필리프 4세는 강력한 세력을 가진 성전

기사단을 와해시키기로 했습니다.

여론 또한 성전기사단에게 그다지

긍정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원래 설립

목적과는 다른 상업활동과 금융업에

지나치게 치중한다는 점, 방종한 생활을

하는 기사들 때문이었습니다. 

왕은 기욤 드 노가레에게 지시하여 성전 기사단을

파멸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노가레는

심한 고문을 자행했으며, 일방적으로

작성된 자백서에 서명하게 했습니다.


54명의 기사가 화형을 당했으며 기사단은

재산 몰수와 종단 해산을 선고 받았습니다.


필리프 4세는 교회 권력과 귀족들의 권력에

맞서서 왕의 권력을 절대적인 우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왕실의 위신은 왕자비들이 일으킨

추문으로 추락해갔습니다. 그는 세 명의

왕자를 두었는데 세 명의 왕자비가 모두

간통을 범하여 한 명은 사형, 두 명은

유폐되었습니다. 필리프 4세에 이어,

세 아들 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가

연이어 왕위에 오르지만 세 아들의

재위기간은 모두 합쳐서 14년에 불과 했으며

모두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카페 왕조는 대가 끊기고,

프랑스의 귀족들은 샤를 4세의 사촌형이자

필리프 4세의 조카인 필리프 6세를 왕으로

선출하였습니다. 그는 발루아 백작이었으므로

이 때부터 발루아 왕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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