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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시온 Oct 14. 2020

프랑스의 역사 7

백년전쟁, 잔다르크, 발루아왕조


아비뇽유수를 일으켜 교황권을 추락 시켰던

카페 왕조의 필리프 4세에게는 아들 셋과

딸 한명이 있었습니다. 세 아들은 연이어

왕이 되었지만, 모두 아들을 낳지 못해

왕조의 대가 끊기고, 친척인 필리프 6세

즉위함으로써 발루아 왕조가 시작되었지요.


딸 이사벨라는 여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까마득한 옛날 프랑크 왕국 시절에 성문화된

살리카 법전에 따른 것이죠. 딸 이사벨라는

여왕이 될 수 없지만 그녀의 아들은 왕위계승권이

있습니다. 이사벨라의 아들이 바로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였습니다.


에드워드 3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필리프 6세

못지 않게 왕위계승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필리프 6세는 충성을 서약하라고 강요해 왔습니다.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의

왕을 칭하였습니다. 그러자 필리프 6세는 마지막

남은 영국령인 아키텐의 가스코뉴를 몰수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영국과 프랑스 간의

100년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인구나 경제규모, 생활수준에 있어서

프랑스가 월등했으나 무기면에서는 영국이 앞서는

상황이었습니다. 영국에서는 탁월한 전술과

신무기 장궁이 있었습니다.


영국군은 프랑스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노르망디에서 아키텐에 이르는 프랑스 서부

영토를 거의 점령했습니다. 특히 흑태자라는

별명으로 불린 에드워드 3세의 맏아들 에드워드는

프랑스 전역을 헤집고 다니며 파괴를 자행하였습니다.

1356년에는 프랑스 왕 장2세를 

납치하기까지 하였습니다.


100년 전쟁 중에는 유럽을 휩쓴 흑사병도 있었고

정식 휴전을 한 기간도 있어서 백년 내내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다가 1415년 또 다시 영국이 선제

공격을 해 왔습니다.


영국의 젊은 왕 헨리 5세는 프랑스 왕 샤를 6세

딸인 카트린 드 발루아와의 결혼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왕위까지 요구하였지요.


영국의 헨리5세 출처 위키피디아


프랑스가 거부하자 헨리 5세는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아쟁쿠르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왕인 샤를6세는 정신병이 있어서

왕비인 이자보가 섭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1420년 체결된 트로아 조약에서 왕비 이자보는

공주 카트린을 영국왕 헨리 5세와 결혼시키고

헨리 5세를 프랑스의 후계자로 인정했습니다.


프랑스의 왕세자 샤를은 어머니 이자보의

문란한 생활 때문에 출생에 의문이 제기된

상태라 왕세자로서의 지위가 흔들린데다가

영국의 점령으로 인해 남쪽으로 도피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1422년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3개월

간격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생후 6개월

밖에 되지 않은헨리 6세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참이었지요. 프랑스가 거의 항복할 즈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잔다르크의 등장입니다.


잔다르크 출처 위키피디아



그녀는 프랑스 북동부의 촌락 동레미에서 태어난

농부의 딸로 양치기 소녀에 불과했습니다. 그녀는

양떼를 지키다가 찬란한 빛 속에서 천사들을

만났는데 천사는 그녀에게 왕세자를 만나고

오를레앙을 해방하라고 분부했답니다.


그녀는 신이 명령한 것이니 그대로 순종해야

한다고 믿고 수비대장을 설득하여 왕세자가

머무는 시농까지 왔습니다. 왕세자 샤를은 그녀가

정말로 신의 계시를 받은 것인지 시험하려고

신하의 옷을 입고 귀족들 사이에 숨어 있었습니다.

성 안으로 안내받은 그녀는 왕세자의 자리에

앉은 자를 외면하고 귀족들 사이에 숨어 있던

왕세자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습니다.



샤를 7세 출처 위키피디아


왕세자 샤를은 그녀에게 군사를 주었고 그녀의

활약으로 프랑스는 극적으로 영국군의

오를레앙 포위를 풀면서 전세를 역전 시켰습니다.

프랑스로서는 오를레앙을 빼앗기면 훨씬

남쪽으로 후퇴해야 할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잔다르크는 왕세자를 랭스 대성당으로 모시고

가서 샤를 7세로 즉위를 시켰습니다.


이후, 샤를7세와 잔다르크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샤를7세는 영국과 평화협정을 하고

싶었고 잔다르크는 영국세력과 친영파인

브르고뉴공의 항복을 받으려고 했거든요.

소수의 군사를 이끌고 다시 종군에 나섰던

잔은 적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1430년 영국은 그녀를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마녀로 판결을 내리고 1431년 화형에 처했습니다.

그녀는 당시 19세였습니다. 잔다르크 덕분에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샤를 7세는 그녀를

구출하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명예를 회복하는데는 

15년의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1435년 친영파였던 브르고뉴 공의 항복을 받고

1436년 왕은 파리에 입성했습니다. 이후 영국이

차지하고 있었던 성과 도시를 하나씩 수복하여

전쟁은 종결되었습니다.


프랑스 국토가 철저히 유린된 100년 전쟁을 겪은 후,

샤를 7세는 상비군을 창설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삼부회를 열어 인두세를 확보하였으며

외국과의 동맹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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