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1세, 샤를 8세, 루이 12세 발루아 왕조
샤를 7세를 이어 왕이 된루이 11세는
아버지의 권위에 대해 반항적이었습니다.
1440년 대영주들이 샤를7세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대영주들 편에 설 정도였지요.
그는 매우 현실적이며 상식을 벗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영국이 프랑스와의 전쟁을
재개 하려하자, 영국과 부르고뉴의 동맹을
저지하기 위해 영국 왕에게 상당량의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하는 피퀴니 조약 (1475)을
체결하였지요. 이로써 백년전쟁의 불씨를
완전히 제거하였습니다. 또한 영국의
에드워드 4세가 프랑스 왕이란 칭호를
계속 사용하는 것을 참아가며 자신을
왕자 루이라고 칭하는 국서를 보내었습니다.
루이11세는 약할 때는 겸손하게 처신하고
강하다고 생각되면 철처하게 복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샤를 7세로 부터
받은 강력한 상비군과 자신의 술책으로 대귀족들의
위협으로부터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뒤를 이은 샤를 8세와 루이 12세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 여인을 사랑했고,
이탈리아를 탐내었습니다.
15세기 말 이탈리아는 르네상스가 꽃피었으며
로마, 베네치아, 나폴리, 밀라노, 피렌체등의 작은
공국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한 공국 내에서도 여러 당파로 분열되어 있었지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이렇게 복잡한 이탈리아의
정치적 상황에서 나온 것이지요.
마키아벨리 출처 위키피디아
정치적 분열과 투쟁에 의해 추방당한
이탈리아인들이 프랑스로 이주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의 거주지역이 있었고,
프랑스귀족들과 혼인도 했으며 궁정과
군대에서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자신들을 추방한 당파를
증오하여 프랑스를 이용해 복수를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샤를 8세와 루이 12세는 이탈리아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궁정과
실내장식에 매료되었지요. 곧 자신의 궁정도
그렇게 장식하고 싶은 욕구가 불타올랐습니다.
프랑스 군대는 점령군으로서 거친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그러자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인들은 프랑스 점령군에 대한
증오감으로 하나가 되어 동맹군을 조직하였습니다.
샤를 8세와 루이 12세의 이탈리아 원정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막대한
전리품을 챙겼고, 르네상스의 물결이 프랑스로
밀려들어오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샤를8세 출처 위키피디아
샤를8세는 이탈리아 원정에서 돌아와 자신의
성관인 앙부아즈로 들어가다가 출입문의 허물어진
돌 모서리에 이마를 다쳐 급사했습니다.
왕비 안 드 브르타뉴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사촌인 오를레앙 가문의
루이 12세가 왕위를 이었습니다.
안 드 브르타뉴 출처 위키피디아
루이 12세는 원래 샤를 8세의 아내인 왕비
안 드 브르타뉴를 흠모해 왔는데 이제 미망인이 된
그녀를 자신의 왕비로 맞이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출생지인 블로아 성을 개수하여
왕비가 옮겨 살도록 했습니다. 왕비는 전남편과 살던
앙부아즈 성을 장식했던 장식품들을 새로운
거처로 옮겨왔지요, 그중에는 이탈리아에서
약탈해온 것들도 있었습니다.
루이 12세 출처 위키피디아
1514년 왕비가 죽자 루이12세는 너무나
상심하여 급속도로 쇠약해졌습니다.
신하들의 강력한 권유로 재혼이 진행되었는데
새 왕비로는 헨리8세의 누이인 메리 공주가
선택되었습니다. 그러나 루이 12세는 결혼식
축하연에 참석했다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랑했던 왕비 안 드 브르타뉴가 죽은지
1년도 되지 않은 1515년 1월 1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