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1세, 앙리 2세, 발루아 왕조
프랑수아 1세 시대는 프랑스의 르네상스가
활짝 꽃피어 문화적으로 도약을 했던 시기입니다.
프랑수아 1세 출처 위키피디아
프랑수아 1세는 루이 12세의 조카뻘 되는
사람으로 루이 12세의 무남독녀 클로드와
결혼하였고 1515년 20대 초반의 나이로
왕이 되었습니다. 전임 왕인 샤를8세와
루이 12세처럼 프랑수와 1세도 이탈리아를
탐하여 여러번 이탈리아 원정을 떠났고
밀라노를 점령하기 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문화와 정신을 프랑스로
들여오는데 적극적이었습니다. 많은 이탈리아
예술가들이 프랑스 왕의 초청을 받고 이주
하였으며 후한 지원을 받았습니다.
레오나르도다빈치 출처 위키피디아
이 때 프랑스로 이주한 대표적인 예술가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입니다. 1516년
프랑수와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에
이주했을 당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60대의
노인이었죠. 왕은 그를 앙부아즈 성과 아주
가까운 클루 (현재의 클로 뤼세)에 저택을
마련해 주고 아버지를 대하듯 극진히
보살폈다고 합니다. 다빈치는 프랑스에
머문지 3년이 지난 1519년 숨을
거두었습니다. 짧은 기간이라 많은
작품활동을 하진 못했지만, 모나리자 등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들을 프랑스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앙부아즈 성 출처 위키피디아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 중계상을 통해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라파엘로등의
예술품을 사들이고 금세공업자나, 건축가들도
초청하였습니다. 궁정은 프랑스 예술의 원천이
되어갔지요. 당시 프랑스인은 젊고, 활기에
넘치며, 교양과 관용을 겸비한 국왕을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외교적으로는 죽을 때까지 스페인의 카를 5세와
대립하였습니다. 영국의 헨리8세는 둘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였지요. 그는 프랑스 왕으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성로마황제 후보로
출마하였는데 카를 5세에게 패하였고,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카를 5세의 포로가 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는 두 아들을 자기 대신에
인질로 보내는데 합의하고 마드리드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로 돌아온 후,
이 조약을 강압에 의한 것이라하며 무시하였습니다.
두 왕자는 스페인에서 혹독한 인질 생활을 했습니다.
인질에서 풀려난 왕세자 프랑수아는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와 결혼했습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었죠.
그러나 프랑수와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둘째인 앙리가 앙리2세로 즉위하였습니다.
앙리 2세 출처 위키피디아
앙리2세는 이탈리아 피렌체 은행가의 딸
카트린 드 메디치와 결혼했습니다. 이 결혼은
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를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교황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함
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메디치 가문이었고, 카를5세를 견제하고자
이 결혼에 찬성하였습니다.
카트린 드 메디치 출처 위키피디아
그러나 앙리 2세는 다른 여인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디안 드 푸아티에 인데
앙리 2세 보다 20년 연상이고, 어린시절 자신의
가정교사였습니다. 왕이 된 이후에도
앙리 2세는 가는 곳 마다 그녀를 동반했습니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 는 몹시 언찮았으나
참을성 있게 견디었으며, 그녀를 덕망이 높은
사람이라고 칭찬하기까지 했습니다. 앙리 2세는
기마경기에 참가했다가 창자루가 안구를 뚫고
들어가 4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디안 드 푸아티에 출처 위키피디아
왕이 자리에 눕자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는 디안이
왕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왕이 디안에게 선물했던
모든 물건들의 목록을 작성하게 한 후, 돌려 줄 것을
요구 했으며,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