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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시온 Oct 20. 2020

프랑스의 역사 10

카트린 드 메디치와 발루아왕조


앙리 2세의 왕비인 카트린 드 메디치

피렌체에서 상업과 금융업으로 성공한

메디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프랑수아 1세가 둘째 아들의 신붓감으로

선택하였을 때 신하들은 이탈리아인이고

원래 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강력히 반대 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수아 1세는 앙리 2세가

둘째 아들이라 왕이 될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결혼을 강행하였습니다.


카트린 드 메디치 출처 위키피디아


카트린은 미인 축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리스어, 천문학, 수학등에 관심이 많은

영리한 여인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녀는 승마술에도 뛰어났는데 두 다리를

말 옆구리에 모으고 타는 방식을 도입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한 그녀가 데리고 온

시종과 요리사들에 의해 이탈리아 과자와

식사 예절이 프랑스에 전해졌다고 합니다.


출처 픽사베이


왕세자였던 프랑수아가 갑자기 죽자

카트린은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편 앙리2세는 20살 연상의 정부

디안 드 푸아티에를 사랑했으며

카트린은 10년간 아이를 낳지 못했지요.


카트린은 심적 고통을 참으면서 후계자를

낳기 위한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마침내 노력의 결실을 맺어 1544년 부터

12년 동안 10명의 아이를 낳았고

이중 4남 3녀가 살아남았습니다.

이 중에서 세 명이 차례로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2세, 샤를9세, 앙리 3세)이

되었고, 딸 엘리자베스는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의 세번째 왕비가 되고,

딸 마르그리트(영화 여왕마고에서 Margot)는

나바르 왕국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남편 앙리 2세가 마상 창시합에 나갔다가

사망한 후, 큰아들 프랑수아 2세가 15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린데다가

병약하여 국정을 주관할 수는 없었는데, 외척인

기즈가문이 강력하여 카트린은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프랑수아 2세가 재위 1년만에 숨을 거두자,

동생인 샤를 9세가 아홉살의 나이로 즉위했습니다.

이 때부터 카트린은 실질적인 섭정을 하면서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16세기 중반, 유럽의 가장 큰 문제는구교와

신교간의 갈등이었습니다. 카트린은 구교와

신교의 충돌을 피하려고 양측의 화해를

모색했습니다. 그러나 카톨릭측의 대표격인

기즈 가문이 수 십명의 신교도를 학살 하는

사건이 일어 났습니다. (바시학살)

이 사건으로 신교도들이 봉기를 일으켰고

곳곳에서 신교와 구교가 충돌했습니다.


카트린은 갈등을 무마하기 위한 방편으로

딸 마르그리트(Margot)를 신교 측 지도자인

나바르의 왕 앙리와 결혼을 시키기로 했습니다.

결혼 계약서를 작성하기 위해 카트린은

나바르의 왕 앙리의 어머니 달브레를 파리로

초청했습니다. 결혼 계약을 마친 후, 파리에서

혼례용 의상을 구입하던 중 달브레는 갑자기

숨을 거두었습니다. 카트린이 독을 뿌린

장갑을 선물하여 죽게 만들었다는 설이

퍼졌지만 사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영화 '여왕 마고' 중 출처 네이버


이러한 불미스러운 사건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은 1572년 8월 18일로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결혼 하객으로 많은 신교 귀족들이

파리로 모여들었지요. 그들 중에는 카톨릭 측에

대한 복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긴장된 분위기는 곧 폭발 할 것 같았습니다.


결혼식이 끝난 후, 8월 22일 아침 신교의

지도자 콜리니를 향해 누군가 총을 쏘았습니다.

가벼운 부상에 그쳤지만, 이 일은 끔찍한 학살로

이어졌습니다. 8월 24일 새벽, 성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카톨릭 귀족들이 거리로 뛰어 나와

신교도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을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곧 전국의 주요 도시들로 퍼져가

그해 가을 까지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이 장면은 화가 프랑수아 뒤부아가 그린

"생 바르텔레미의 학살"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프랑수아 뒤부아가 그린 '생바르텔리미의 학살' 출처 위키피디아


병약했던 샤를 9세는 이 사건이 있은지

2년 뒤인 1574년 결핵으로 사망했습니다.

23살의 젊은 나이였지요. 다음 왕위는

동생인 앙리3세가 이어받았습니다.


앙리 3세는 야심이 강해서 어머니의

기대와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그는 평소 프랑스 왕위를 노리고 있었고,

즉위 당시에는 폴란드의 왕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종종 변태적인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이를 낳지 못했고, 

동생인 알랑송 공도 사망하였습니다.


따라서 왕위 계승자는 여동생의 남편이자

신교의 지도자인 나바르 왕국의 앙리가 되었지요.

카톨릭측은 필사적으로 이를 막아야 했으므로

카톨릭 인사인 샤를 추기경을 천거하면서

귀족 세력을 규합하여 카톨릭 동맹을 조직하였습니다.

 그들은 앙리 3세마저도 배척하였습니다.


1588년 앙리3세는 블루아 성으로 도주하여

이곳을 근거지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카톨릭 동맹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블루아 성 출처 위키피디아


그해 12월 앙리 3세는 기즈공을 블루아

성으로 초빙했습니다. 담판을 지으려고

왔던 기즈가문 인사들은 이 곳에서 왕의

근위대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이로써 카톨릭의 계획은 무산되고, 

왕위는 나바르의 앙리가 이어받아 발루아 왕조는

끝나고 부르봉 왕조가 시작됩니다.


카트린은 기즈 가문이 제거된 다음해인

1589년 6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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