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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시온 Oct 21. 2020

프랑스의 역사 11

잉리 4세, 부르봉 왕조


앙리 4세는 오랫동안 이어져온 종교 전쟁을

마무리 짓고, 프랑스의 황금시대를 가져온

부르봉 왕조의 첫 번째 왕입니다.


당시 프랑스는 오랜 기간 이어져 온

종교 전쟁으로 피폐해져 있었고, 국가 재정

또한 고갈된 상태였습니다. 개신교 위그노의

지도자이며 나바르의 왕인 앙리 4세가

프랑스 왕이 되자, 카톨릭동맹은 재결집하였습니다.


앙리4세는 당파성을 벗어나서 국민의 단결을

호소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정직하게 자기 양심을 따르는 사람은 짐과 종교가 같다. 
짐은 용감하고 선량한 사람들의 종교에 가담할 것이다.



왕은 재집결한 카톨릭 동맹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국민들은 카톨릭 동맹에

염증을 느꼈습니다. 카톨릭동맹은 스페인 등

프랑스와 적인 외국세력들과 연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오랫동안 지속된

전쟁으로 사람들은 심한 경제적 고충을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은 활달하고 현명한

앙리 4세에게 호감을 가졌습니다.


앙리4세 출처 위키피디아



1593년 앙리 4세는 카톨릭으로 개종하였고,

스페인과 친선관계를 회복하였습니다.

또 프랑스의 추기경들을 설득하여

그들로 하여금 교황이 양보하도록 하였습니다.


1598년에는 낭트칙령을 내려 개신교 교파인

위그노의 종교 자유를 인정함으로서

종교전쟁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재정 문제에 있어서는 친구 막시밀리앵

드 베튄을 쉴리 공작으로 서임하고

도움을 구했습니다. 쉴리 공작은 매우 유능한

인물로 횡령을 일삼던 많은 징수관, 경리관을

가차없이 처단했으며 부정한 소득을

철저히 환수했습니다. 왕은 그에게 재정을

일임하는 동시에 포병대의 재건까지 맡겼습니다.

그는 토지경작과 목축을 중요시 하여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하였습니다.


앙리 4세도 쉴리처럼 농민에게 관심이 많았고,

일요일 마다 그들의 냄비속에 닭이 

들어있기를 원했다고 전합니다.


앙리 4세는 수많은 여성들과 애정행각을

벌였습니다. 알려진 여성의 이름만도 50명이

넘습니다. 첫 번째 아내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카트린 드 메디치의 딸)의 남성편력도

그에 못지 않았습니다. 둘은 오랫동안 별거를

했으며 둘 사이에 아이도 없었습니다.


1600년 앙리 4세는 투스카니 대공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대공의 질녀 마리 드 메디치

결혼 했습니다. 28살인 그녀는 몹시 뚱뚱해서

은행가의 뚱뚱보 딸이란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마리 드 메디치 출처 위키피디아



폐위된 왕비 마르그리트는 파리에 살면서

새 왕비 마리 드 메디치와 친숙하게 지내고

그녀가 낳은 자녀들을 고루 사랑하며

돌보았다고 합니다.


1610년 앙리 4세는 마차를 타고 가던 중,

마차에 뛰어 오른 한 남자의 비수에 찔려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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