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역사 12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부르봉 왕조

by 신시온


루이 13세시기는 재상 리슐리외와 함께

절대주의의 기반을 닦은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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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13세 출처 위키피디아


아버지인 앙리 4세는 우여곡절 끝에 오랫동안

끌어온 종교전쟁을 마무리 지었지요. 국민들은

백년 전쟁 이후 싹트기 시작한 애국심이 있었고

종교로 인한 전쟁에 염증을 느낀 터라 강력한

왕을 중심으로 한 질서를 바랬습니다.


1610년 앙리 4세가 암살 당하자, 루이 13세는

9세의 어린 나이로 왕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어머니인 마리 드 메디치가 섭정을 하게 되었지요.

그녀는 남편 앙리 4세가 지나치게 여색을 밝힌

탓에 남편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적었고,

프랑스어를 잘 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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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드 메디치 출처 위키피디아


그녀에게는 피렌체에서 데려온 소꿉동무

레오노라 갈리가이가 있었는데 이 친구가 왕비의

고독감과 소외감을 많이 달래어 주었습니다.

레오노라 갈리가이는콘치노 콘치니라는

멋쟁이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부부가

수 년간 섭정 마리 드 메디치를 농락했습니다.


그러던 중 1614년 삼부회가 열렸습니다.

이곳에서 성직자 대표로 나선 젊은 주교

리슐리외가 섭정 모후 마리 드 메디치를 매혹

시키는 완벽한 연설을 했습니다.


리슐리외는 성직의 임무보다는 정치적 야망이

컸으므로 성공을 위해 자기 계발에 몰두 했으며

섭정의 관심을 끄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섭정 마리 드 메디치의 추천으로

정계 실세가 되었지요.


따라서 당시 프랑스의 권력은

섭정 모후 마리 드 메디치, 콘치니와 부인 갈리가이,

리슐리외가 나누어 가지게 되었습니다.


루이 13세는 샤를 달베르라는 미소년 친구와

함께 놀이에 빠져 지내고 있었으므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요.


루이 13세가 열 여섯살이 되었을때, 콘치니가

당크르 원수로 서임되고 지나치게 권력을

휘두르자 왕은 비밀리에 근위대장을 시켜

암살했습니다. 그리곤 자신이 국왕임을

선포하였지요. 방심하고 있었던 리슐리외는

관구로 피신했고, 어머니 마리 드 메디치는

블루아 성관으로 망명했으며 갈리가이는

화형 당했습니다.


이렇게 권력을 장악한 루이 13세는 1624년

리슐리외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하여

재상으로 임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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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슐리외 출처 위키피디아


리슐리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 첫 번째 목표는 국왕의 존엄성 확립이고

두 번째 목표는 왕국의 위대성을 유지하는 일이다.


그는 국가를 분단하는 어떤 존재도 용인하지

않았으므로 국내에 남아있는 위그노 파에게

국왕에 대한 복종을 요구했고, 스페인의

카톨릭 교도 보다 프랑스의 신교도를

더 좋아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귀족들의 무사 기질이 국가에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결투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의 관점에서 정부의 목적은 국가의 안정에

있었으며 이것 없이는 행복도, 국가도 없었습니다.

이 기간에 30년 전쟁이 있었는데

종교보다는 국익을 위하여 독일의

신교파에 가담하여 싸웠습니다.


리슐리외의 국가주의는 성공을 거두어

프랑스는 유럽의 패권국가로서 지위를 굳혔으며

근대국가로 탈바꿈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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