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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시온 Oct 22. 2020

프랑스의 역사 12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부르봉 왕조


루이 13세시기는 재상 리슐리외와 함께

절대주의의 기반을 닦은 시기입니다.







루이13세 출처 위키피디아


아버지인 앙리 4세는 우여곡절 끝에 오랫동안

끌어온 종교전쟁을 마무리 지었지요. 국민들은

백년 전쟁 이후 싹트기 시작한 애국심이 있었고

종교로 인한 전쟁에 염증을 느낀 터라 강력한

왕을 중심으로 한 질서를 바랬습니다.


1610년 앙리 4세가 암살 당하자, 루이 13세는

9세의 어린 나이로 왕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어머니인 마리 드 메디치가 섭정을 하게 되었지요.

그녀는 남편 앙리 4세가 지나치게 여색을 밝힌

탓에 남편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적었고,

프랑스어를 잘 하지 못했습니다.



마리 드 메디치 출처 위키피디아


그녀에게는 피렌체에서 데려온 소꿉동무

레오노라 갈리가이가 있었는데 이 친구가 왕비의

고독감과 소외감을 많이 달래어 주었습니다.

레오노라 갈리가이는콘치노 콘치니라는

멋쟁이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부부가

수 년간 섭정 마리 드 메디치를 농락했습니다.


그러던 중 1614년 삼부회가 열렸습니다.

이곳에서 성직자 대표로 나선 젊은 주교

리슐리외가 섭정 모후 마리 드 메디치를 매혹

시키는 완벽한 연설을 했습니다.


리슐리외는 성직의 임무보다는 정치적 야망이

컸으므로 성공을 위해 자기 계발에 몰두 했으며

섭정의 관심을 끄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섭정 마리 드 메디치의 추천으로

정계 실세가 되었지요.


따라서 당시 프랑스의 권력은

섭정 모후 마리 드 메디치, 콘치니와 부인 갈리가이,

리슐리외가 나누어 가지게 되었습니다.


루이 13세는 샤를 달베르라는 미소년 친구와

함께 놀이에 빠져 지내고 있었으므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요.


루이 13세가 열 여섯살이 되었을때, 콘치니가

당크르 원수로 서임되고 지나치게 권력을

휘두르자 왕은 비밀리에 근위대장을 시켜

암살했습니다. 그리곤 자신이 국왕임을

선포하였지요. 방심하고 있었던 리슐리외는

관구로 피신했고, 어머니 마리 드 메디치는

블루아 성관으로 망명했으며 갈리가이는

화형 당했습니다.


이렇게 권력을 장악한 루이 13세는 1624년

리슐리외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하여

 재상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리슐리외 출처 위키피디아


리슐리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 첫 번째 목표는 국왕의 존엄성 확립이고

두 번째 목표는 왕국의 위대성을 유지하는 일이다.


그는 국가를 분단하는 어떤 존재도 용인하지

않았으므로 국내에 남아있는 위그노 파에게

국왕에 대한 복종을 요구했고, 스페인의

카톨릭 교도 보다 프랑스의 신교도를

더 좋아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귀족들의 무사 기질이 국가에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결투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의 관점에서 정부의 목적은 국가의 안정에

있었으며 이것 없이는 행복도, 국가도 없었습니다.

이 기간에 30년 전쟁이 있었는데 

종교보다는 국익을 위하여 독일의 

신교파에 가담하여 싸웠습니다.


리슐리외의 국가주의는 성공을 거두어 

프랑스는 유럽의 패권국가로서 지위를 굳혔으며 

근대국가로 탈바꿈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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