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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시온 Oct 26. 2020

프랑스의 역사 13

루이 14세, 마자랭, 부르봉 왕조


루이 14세는 "짐은 곧 국가다"라는 말로

대변되는 17세기 절대군주의 대명사입니다.

그는 발레를 좋아하여 15세에 "밤의 발레"라는

공연에 아폴로 역으로 출연해 태양왕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루이 14세 출처 위키피디아



아폴로로 분장한 루이 14세 출처 위키피디아


그는 루이 13세와 리슐리외가 이루어 놓은

강대한 프랑스를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는 겨우 5살이었죠.

어머니인 안 도트리슈가 섭정을 맡게 되었는데

그녀는 추기경 쥘마자랭을 재상으로 임명했습니다.


마자랭은 전임인 리슐리외의 국가주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 받았습니다. 그러자 리슐리외의

강력한 정책에 눌려 지냈던 세력들,

즉, 고등법원과 대귀족들이 합세하여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의 선동을 받은

파리 시민들도 봉기하였습니다.


마자랭의 창문에 돌을 던짐으로써 시작되었기

때문에 프롱드 (fronde 투석기)의 난이라 합니다.

어린 루이 14세는 어머니와 함께 파리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프롱드의 난은 반란 세력 내부의 분열과 스페인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음모가 발각되어 곧 진압이

되었지만 이 사건은 루이 14세가 이후에 절대군주가

되려고 노력하는데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마자랭 출처 위키피디아


마자랭은 리슐리외보다는 유연했으나

강인하게 계획을 추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1648년 독일의 베스트팔렌 지역에서

30년 전쟁을 종결 짓는 조약이 맺어졌습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알자스 지방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독일 지역은 350개의 독립 연방국으로

분할 되었습니다.베스트 팔렌 조약은 프랑스를

유럽의 절대적인 지배자로 만들었고 스페인은 약해졌습니다.


그래도 스페인은 프랑스에 분쟁이 있을 때 마다

개입했습니다. 이에 마자랭은 스페인을 타도하기

위해 신교도인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과

동맹을 맺기도 했으며 뒤누 전투에서 스페인을

대파하기도 했습니다.


루이 14세는 마자랭의 질녀인 마리 만치니를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마자랭은 왕을

설득하여스페인의 공주 마리 테레즈 도트리슈

결혼하게 하였습니다. 스페인과의 평화를 얻기

위함이었지요.1661년 마자랭이 숨을 거두자,

왕은 재상을 두지 않고 친정을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루이 14세는 스스로 재상이 되었고

고문관회의에서 성직자를 임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파리에서 조금 떨어진 왕실의 사냥터였던

베르사유에 수많은 건물을 증축하여 

1682년 부터는 이곳을 주로 왕궁으로 사용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 정원 출처 픽사베이


그리고 귀족들이 베르사유 궁전에 거주하도록

하였지요. 궁정에는 5천여명의 귀족들이

살면서 화려한 파티와 음식을 즐기고 도박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지방에서의

세력을 잃게 되었고, 이곳에서의 사치스런

생활을 유지하느라 막대한 지출을 해야했지요.

귀족들은 점점 왕의 배려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예의를 세부적으로 규정해 놓고 

그것을 어길시에는 경박한 사람으로 치부하였습니다.


베르사유 궁전 정원 출처 위키피디아


루이 14세는 삼부회를 한번도 소집하지 않았고

고문관회의를 통해 통치했는데, 오직 왕에게만

결정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귀족보다는 평민을

등용하는 일에 꺼리낌이 없었습니다.


재정을 담당한 콜베르에 의해 실시된

중상주의 정책은 금은의 유출을 방지했으며

통제경제정책으로 국영공장과 전매제도

창안했습니다. 또 근대식 상비군을 30-40만명의

규모로 키워 스페인 왕위계승전쟁등 유럽에서의

패권을 잡기 위한 여러 전쟁에 개입하였습니다.


또 낭트 칙령을 취소하여 신교도의 종교자유를

탄압하였습니다. 이에 위그노들이 대거

망명하였는데 유능한 인재가 국외로 유출되어,

이후 프랑스의 국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지요.


왕은 살아있는 신으로 군림하고자 했으며

왕을 위해 자신의 아내 마져도 내어 놓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왕의 사생활도

국가의 공식적인 일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루이 14세의 동생은 여자처럼 생겼고,

남자 애인에게 빠져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 앙리에트는 영국 왕 찰스 2세의

동생으로 시아주버니인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았으며 프랑스와 영국을 중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루이 14세의 공식적인 첫 번째 후궁은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였는데 네 명의 왕자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지위를 무척 부끄러워하며

수녀원으로 들어가기를 소망하였습니다.

때마침 왕은 몽테스팡 후작 부인에게 매료되기

시작하였으므로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는

소원하던 수녀원으로 들어가 여생을 마칠 수 있었지요.


몽테스팡 후작부인은 왕과의 사이에서 8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왕의 총애는 어느덧 아이들의

가정 교사였던 스카롱 부인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스카롱 부인은 지적이고 정숙한 태도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맹트농 후작

부인으로 서임되었습니다. 왕비가 죽은 후,

루이 14세는 맹트농 부인과 비밀리에 결혼하였습니다. 

당시 맹트농 부인은 49세, 왕은 46세였습니다. 

왕은 1715년에 사망하였는데 총 72년간 재위하여 

유럽의 군주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다음 왕위는 증손자인 루이 15세가 이어받았는데

5살의 어린 나이였습니다.

1712년 부터 이상하게도 왕위계승자들이

줄줄이 사망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베르사유 중에서 루이 14세



넷플릭스 드라마 베르사유 중 거울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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