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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시온 Nov 08. 2020

프랑스의 역사 18

나폴레옹 1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된 이후 수립된

총재정부는 500인회와 원로원으로

이루어진 양원에서 5명의 총재를

선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의사당 경호를

위해 창설한 혁명방위군 사령관으로

바라스를 위촉하였습니다. 

바라스가 임명한 여단장 중에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난

하급 귀족신분의 군인이었으나 혁명

전쟁 중이던 1793년, 영국과 에스파냐

함대가 봉쇄하고 있던 툴롱 항구를

탈환한 공로로 여단장이 된 것입니다.


젊은 나폴레옹 출처 픽사베이


이후, 열정적인 활약으로 부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바라스는 자신의 정부인

조세핀 드 보아르네를 나폴레옹에게

보내줄 정도로 신뢰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으며

얼마 후, 둘은 결혼을 하였지요.



조세핀 출처 픽사베이


총재정부는 오스트리아를 제압하기 위해

이탈리아 원정을 계획하고 나폴레옹을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1796년, 그에게 주어진 군대는 오합지졸이고

사기마저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뛰어난 웅변술은 군사들로 하여금 곧 점령할

풍요로운 이탈리아 도시들을 떠올리게하였습니다.

그는 1년 동안 거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여

이탈리아를 점령한 오스트리아군을 무찔렀습니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 점령군이 물러나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프랑스군을 해방자로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또한 점령군이라, 이탈리아의 많은

예술품들을 약탈하여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갔습니다.


1797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점령하여

오스트리아로 부터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와 벨기에를 양도받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오랜 혁명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쳐있던

프랑스 국민은 나폴레옹에게 환호했습니다.


이제 총재정부는 나폴레옹의 인기를 견제하고

싶었습니다. 정부는 나폴레옹에게 이집트 원정을

명령했습니다. 프랑스 국민과 나폴레옹을 떼어놓기

위함이었는데, 명목은 영국의 인도 무역로를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1798년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을 떠났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은 많은 학자들을 수행하여

이집트의 고대 유적을 발굴했습니다.

그 때 발견한 유물 중의 하나가 로제타 석입니다.

(로제타 석은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에

결정적인 열쇠가 되었는데 이후 영국에게

빼앗겨 지금은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로제타 스톤 출처 위키피디아



이집트 원정군은 영국의 넬슨제독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아부키르만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가 격파되면서 보급로가 차단되어

원정군은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1799년 10월, 나폴레옹은 군대를 이집트에

남겨둔 채 단신으로 귀국하였습니다.

그리곤 총재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과 그들이

모아둔 군대를 동원하여 총재정부의 지도자들을

감금했습니다. 곧 정부의 해체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헌법을 개정하여 스스로 통령이 되어

통령정부를 열었습니다.


통령은 나폴레옹을 포함하여 모두 세 명이었으나

사실상 제1통령인 나폴레옹이 권력을 독점하였으며

1802년에는 다시 헌법을 개정하여 종신통령

되었습니다. 이때 국민투표를 실시했는데 350만표

대 8천표라는 압도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우선 내정 개혁에 집중하기 위해

1802년 영국과 아미앵 조약으로 휴전을 하여

대외적으로는 평화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였지요.


전국적으로 세금 제도와 행정제도를 정비하고

산업 전반의 부흥에 힘을 쏟았습니다.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였고, 공공 교육법을

제정하였습니다. 또 카톨릭 성직자들에게

국가가 봉급을 지불하기로 했습니다.

카톨릭은 대혁명 때, 재산을 몰수당하였는데

나폴레옹은 이러한 조치로 카톨릭과

화해하였습니다.


1804년에는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하였습니다.

만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며, 종교의 자유 ,

경제활동의 자유 등 근대적인 가치관을

포함하고 있는 법전입니다.


강력한 내정 개혁 실시로 인기가 더더욱

높아지자, 그는 황제가 되기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였습니다. 1804년 7월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대다수의 국민들이 제정을

수락하였고, 나폴레옹은 1804년 12월 2일

즉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 출처 픽사베이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된 황제 즉위식에서

그는 교황의 손에서 황제관을 손수 받아들고

자신의 머리에 얹었습니다. 이제 그는 프랑스

최초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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