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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시온 Nov 07. 2020

절두산 순교 성지,
양화진 외국인 묘지

답사 후기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배움에의 열정이 가장

열렬한 분들로 구성된 학습 동아리 함성소리를

알게 된 것은 나의 복이다.


추석 즈음해서 함성소리를 위해 크리스트교의

역사에 관해 3회에 걸쳐 강의를 했었다.

네이버 밴드 라이브 방송 강의였다.



가을이 짙어지는 10월쯤엔 강의와 연계하여

크리스트교와 관련된 장소로 답사를 다녀오고

싶다는 요청을 하셔서 절두산 순교 성지와 

양화진 외국인묘지를 추천하였다.

날자를 정하고 나도 함께 동행하기로 하였다.


11월 4일. 하늘은 그 어느때 보다 쾌청하여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날씨도 일기예보와는

다르게 그리 춥지 않았다. 회원들이 차례차례

도착하기 시작했는데, 도착하는 즉시, 제각각

가방 속에서 간식을 하나 씩 꺼내어 나누어 주었다. 

귤, 요구르트, 견과류,사과 등등 

그런데 갓 삶은 달걀을 하나씩 호일에 싸오신 분도 있었다.

따끈 따끈한 달걀을 받아든 순간, 

마음까지 따뜻해 지는 것이, 

이것이 사람사는 즐거움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 순간에 서 있다는 사실이 감동적이었다.


사실 그동안 너무 고립된 생활을 했다.

워낙 성격도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몇 달 동안 코로나로 외출을 억제하다보니

매체를 통해 극단적인 어두운 뉴스들만

접한 결과,  많이 우울해 있었던 것 같다.


합정동에 도착해서, 유서 깊은, 그리고 깔끔한

곰탕으로 점심을 먹고 절두산 순교 성지로 향했다.





이곳의 원래 이름은 잠두봉이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의 섭정 시기에 일어났던

병인박해 때 많은 천주교도들이 희생을 당해

절두산으로 불리운다.





이 형구틀은 당시 천주교도들에게 교수형을 집행하기 위해 고안된 형구라고 한다.


천주교는 조선 후기 청나라를 통해 들어왔다.

당시 청나라에는 예수회의 사제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마테오리치가 쓴 "천주실의"라는

책을 보고, 최초의 천주교 세례교인이 된 사람이

이승훈이다. 이승훈의 부인이 정약용의 누이였기

때문에 정약용의 형제들이 천주교를 접하게 되었다.


처음엔 서양의 학문, 즉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소개가 되었으나 점점 교세가 확장되자,

정부에서는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제사를 금지하고,하느님 앞에 모두 평등한

형제자매라는 교리가 성리학적 질서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대대적인 처형이

이루어 졌던 것은 정조가 서거하신 바로

다음해에 있었던 신유박해 (1801)이다.

이 때에 이승훈, 정약종 (정약용의 형)등도

사형당했고 정약용, 정약전(정약용의 형)은

귀양에 처해졌다. 이 사건은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정조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 투쟁이었다.



최초의 신부 김대건 신부


이후 여러차례에 걸쳐 천주교 박해 사건이

있었는데 또 한 번의 대대적인 처형이

병인박해이다. 병인박해 또한 정치적인

계산이 숨어있는 사건이었다.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는 천주교 신자였다.

당시 서양열강의 통상 요구에 시달리던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의 도움을 얻고자

프랑스 신부들에게 프랑스 정부와의 연계를

도와달라고 했으나 반응이 없었고, 이 일로

조정의 신하들로 부터 천주교와 가까이

지낸다는 비난을 심하게 받았다. 

그러한 비난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1866년

천주교도들을 절두산에서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수 개월 동안 8천여명이 처형되었고 프랑스

신부 9명도 처형되었다. 이 일을 핑계로 프랑스가

강화도로 쳐들어오는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성지에는 예수의 길 14처가 조각되어있고 신도들은 각 처마다 멈추어 경건하게 묵상한다.



척화비 (서양이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고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라는 내용)





양화진 외국인 묘지는 절두산 성지에서 5분 거리이다.

이곳은 대한제국 시절과 국권침탈기에 우리나라에서

활동한 개신교 선교사들을 모신 곳이다.

작고 아담한 서양식 묘지로 꾸며져 있다.



대한매일신보 베델의 묘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우리는 이 묘지에서 특히 영국인 베델의 비석 앞에

오래 머물렀다. 베델은 러일전쟁 시기, 취재차

우리나라에 왔는데 신민회의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창간하였다.

일본의 검열을 피하고자 이 신문은

 베델의 이름으로 발행하였다.


대한매일신보에는 양기탁, 신채호, 박은식등이

일본에 대한 비판 논설을 실었으며 곧 발행부수

최대의 신문사가 되었다. 또 국채보상운동의

모금운동도 전개하였다. 일본은 영국을 압박하여

베델을 두 번이나 재판정에 서게 하는 고초를

당하게 하였다. 베델은 1909년 사망하였는데

죽으면서 양기탁의 손을 잡고서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하여 한국동포를 구하라

유언하였다고 전한다.


베델이 죽자, 당시 한국 언론인들이 국민 성금을 모아

그의 묘비를 만들었므로 외국인 묘지에서 유일하게

베델의 비석만 한국식이다.

 비석 뒷면의 묘비문은 장지연이 썼는데 

일본인들은 그 내용이 못마땅하다고 지워버렸다.


베델 비석의 뒷면 지워진 부분





쓰러져 가는 대한 제국에 대한 베델의 뜨거운 애정을

고마운 마음으로 되새기다보면 또 떠오르는 사람이

헐버트이다. 미국인 헐버트는 1886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학문을 가르치던 육영공원의

선생님으로 초빙되어 인연을 맺은 후, 죽을 때까지

무너져가는 대한제국의 편에서 항일운동을 지원하였다.

을미사변후, 고종의 신변을 걱정하여 침전 앞에서

불침번을 섰으며, 헤이그 밀사 파견에 적극적인

도움을 주신 분이다.



호머 헐버트의 묘




헤어지기 전 따뜻한 마음을 나눈 티타임



몇 개월만의 나들이인지,

매사에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들을 이웃으로 둔다는 것은

인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 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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