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시온 Nov 18. 2020

프랑스의 역사 22

제 2 제정, 루이 나폴레옹


1848년 2월 혁명의 결과, 보통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공화정 수립에 찬성하였지요.

이에 따라 제 2 공화정이 출범하였습니다.

(제 1공화정은 프랑스 대혁명 때,

국민공회 시기에 수립된 바 있습니다.)


1848년 12월에 치러진 최초의 대통령

선거에는 4명의 후보가 출마하였는데

그 중에서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루이 나폴레옹)가 압도적인 찬성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 1세의

조카로서, 삼촌의 후광 덕을 톡톡히

본 셈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이어져 온

혁명과 전쟁 때문에, 불안정한 정세속에

살아온 프랑스인들에게는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나폴레옹에 대한 향수가

강했으니까요.


제 2 공화정의 헌법에는 대통령 임기는

4년이고 재선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대통령이 군사력을 임의로 행사할 수

있도록 정해두었습니다. 루이 나폴레옹은

이를 이용하여 임기 중에 군대와 왕정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놓고 쿠데타를 감행하였습니다.


1851년 12월 파리에서는 380명이

재판도 받지 않고 총살되었으며,

전국에서 2만6천여명이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정을 부활 시키기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였는데, 개표 결과, 740 만표, 반대

65만표로제 2제정이 수립되었습니다.


루이 나폴레옹은 삼촌이 그랬듯이 황제가

되었으며 나폴레옹 3세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루이 나폴레옹 (나폴레옹 3세) 출처 위키피디아


그의 치세 기간은 부유하고 풍요했습니다.

산업혁명이 급속도로 진행 되는 시기였기

때문이지요. 교통, 통신 등이 발달하고

도시계획이 진행되어 파리의 번화가는

화려해졌습니다. 프랑스 은행 제도가

현대화 되었고, 철도 체계가 개선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대규모 공공사업은 부정과 부패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으며 많은 신흥 브르조아

계층이 성장하였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영국과 함께 수에즈 운하

건설에 동참했으며, 영국과 연합해 크림전쟁에

참전하여 러시아 제국을 패배 시켰습니다.

또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 참여하여 사보이와

니스를 획득했습니다.


그러나 제 2제정에 대한 지지는 멕시코 원정

실패와 유럽에서의 외교적 패배로 인해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웃나라 프로이센은 원래 군사강국인데다가,

당시 프로이센의 왕인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를

재상으로 임명하였습니다.


프로이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출처 위키피디아


흔히 철혈 재상으로 불리는 비스마르크

보수적이고,주도면밀하며, 호전적인 사람으로

의회의 반대를 무시하고 군제 개혁을

강행하였습니다. 병사들을 장기 복무 시키고

직업군인의 비율을 늘렸으며 장비를 대폭강화

했습니다. 프로이센군은 군사훈련과 병영생활을

통해 엄격한 기강과 복종의 정신을 길렀습니다.


반면 프랑스는 자유주의의 분위기가 강했으며

그에 따라 군대도 약화되어 있었습니다.

돈으로 군대 복무를 면제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프로이센 - 프랑스전쟁의 발단은 스페인

왕위계승 문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870년 스페인에서 왕위가 공석이 되어 

프로이센의 왕가인 호엔촐레른 가문의 

왕자가 스페인 왕위를 이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프로이센을 견제하려던 나폴레옹 3세가 

강력히 반대를 했습니다.


전쟁의 빌미를 잡은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먼저 선전포고를 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갔습니다.

프랑스 대사가 프로이센 왕에게 결례를 했다고

대대적인 선전을 한 것이죠. 

그러자 프로이센 국민이 프랑스에 대해 

노골적인 적개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에 나폴레옹 3세는 의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프로이센에 선전 포고를 하였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의회가 지지하지 않는

전쟁을 황제가 시작한 셈이었지요. 반면

프로이센에서는 군관민 일체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 먼저 선전 포고를 당했다는 명분까지

확보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프랑스는 연전연패를 거듭했고 결국

나폴레옹 3세는 스당 전투에서 프로이센의

포로가 되어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프랑스 의회는 서둘러 제정이 끝났음을

선언하고 임시정부를 구성하였습니다.


프로이센군은 거칠 것 없이 프랑스로

쳐들어와 파리를 포위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르사유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재상 비스마르크 덕에,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로 즉위한 것이지요.


독일제국 초대 황제 빌헬름 1세 출처 위키피디아


프랑스 국민들은 임시정부가 프로이센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으려 하자 자치 정부를

구성하였는데 이것이 파리 코뮌입니다.

파리 코뮌은 베르사유에 둥지를 튼 임시정부에

의해 두 달만에 진압되었습니다.


임시 정부는 1871년 1월 28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휴전 조약에 서명했고, 2월에 치러진

선거를 통해 제 3공화정이 출범하였습니다.


제 3공화정은 프로이센에 50억 프랑의 막대한

배상금을 주고, 알자스, 로렌 지방까지 

양도한다는 조건을 이행해야 했습니다.



알자스 지방 출처 픽사베이


알퐁스 도데가 쓴 단편소설"마지막 수업"

이 전쟁으로 프랑스가 알자스 로렌지방을

프로이센에게 넘겨주는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프랑스의 역사 2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