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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시온 Dec 16. 2020

스페인의 역사 11

카를로스 2세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카를로스 2세는 펠리페 4세의 아들 중


유일하게 살아 남아 4살 때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체적 장애를 앓고 있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이어져 내려온


주걱턱이 심해서 입을 다물고 있기 어려웠으며,


여섯 살 때까지 제대로 서지도 못했고,


홍역, 수두, 천연두, 뇌전증 (간질), 피부병을 앓았습니다. 


이렇게 병치레를 하니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어서 


열 살때까지 제대로 글을 못읽고, 


죽을 때까지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고 합니다.



카를로스 2세 출처 위키피디아


그는 1679년 프랑스왕 루이 14세의 조카였던


마리아 루이사와 결혼했습니다.


그 이유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두 사람을 결혼시키기로 조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카를로스 2세는 마리아 루이사에게


첫 눈에 반하여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려고 했습니다.



마리아 루이사도 그의 진심을 알고 그의 사랑을


받아들였으며 10년간 결혼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아이가 생겨나지 않았고


왕비는 갑자기 숨을 거두었습니다.



신하들이 곧 두번째 왕비를 맞이 하도록 했지만


그는 새 왕비에게 관심이 없었고 건강은 점점


더 악화 되었습니다. 그러자 신하들과 주변국들이


후계자를 정하라고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이 서로 스페인 왕위계승을 


주장하여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 두 나라가 왕위계승을 주장하는 이유는


카를로스 2세의 누이중 마리아 테레사


프랑스의 루이14세와 결혼을 했고,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신성로마제국의


레오폴트 1세와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펠리페 4세의 딸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은 카를로스 2세가


죽기 전부터 자국의 후보자를 지명하도록


스페인 궁정에서 치밀한 외교전을 펼쳤는데


승리한 쪽은 프랑스였습니다.



카를로스 2세는 스페인의 법과 제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프랑스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리하여


루이 14세의 손자인 펠리페 5세


스페인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카를로스 2세를 끝으로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끝을 맺었고


펠리페 5세부터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스페인의 왕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죠.



1701년 펠리페 5세가 마드리드에 들어와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 국가들이


프랑스와 스페인을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면 프랑스에서 펠리페 5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즉, 루이 14세가 죽은 후, 펠리페 5세가


프랑스와 스페인의 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된다면 유럽에서 또 다시 초대형 국가가


등장하게 되어 힘의 균형이 깨지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주변국들은


신성로마제국 출신의 후보자를 지지하며


프랑스와 스페인을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 출처 위키피디아


네덜란드도 프랑스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루이 14세는 네덜란드 스페인 령에 프랑스


군대를 보내 네덜란드를 위헙했기 때문이지요.


포르투갈은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편을


들었습니다.



영국, 네덜란드, 포르투갈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보자를 지지하자


스페인 왕위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커졌습니다.



스페인 내에서도 펠리페 5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펠리페 5세는 카를로스


2세의 유언을 무시하고 스페인을 프랑스처럼


바꾸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마드리드 궁정의


고위 관리직을 거의 프랑스인들로 바꾸었고


그들이 스페인의 정책을 정했습니다.


펠리페 5세 출처 위키피디아



원래 아라곤 왕국이었던 카탈루냐 지방은


펠리페 5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프랑스인들을 믿었다가 발등을 찍힌


경험이 있어서 프랑스는 분명히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없앨 것이라고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유럽 국가들의


각축전을 스페인 계승전쟁이라고 하는데


1701년에 시작하여 1714년에 끝났습니다.


그 결과 맺어진 위트레흐트 조약에서는


펠리페 5세를 스페인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펠리페 5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박탈했습니다.



그리고 신성로마 제국 편에 섰던 나라들은


펠리페 5세로부터 스페인의 영토를 양도 받았습니다.


영국은 지브롤터와 메노르카를 양도 받았지요.


영국이 이 지역을 요구한 이유는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요충지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hani. co.kr



1802년 스페인은 메노르카 지역은 회복했지만


지브롤터는 아직 영국의 영토로 남아 스페인과


영국의 영토분쟁 지역이 되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은 네덜란드에 있는 스페인의 영토와


나폴리, 사르데냐, 밀라노 공국의 많은 부분을


획득했습니다. 이렇게 펠리페 5세에 대항하여


전쟁에 참여했던 각국은 각자 이익을 챙기고 떠났습니다.



하지만 카탈루냐 지방은 부르봉 왕가의


펠리페 5세와 끝까지 싸우기로 했습니다.


1713년 펠리페 5세와 카탈루냐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년간 저항했지만 결국


바르셀로나는 펠리페 5세의 군대에 의해


무너져 내리고 항복했습니다.



펠리페 5세는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빼앗아


카스티야 왕국에 통합시킴으로서


오늘날의 스페인의 모습이 갖춰지기 시작했습니다.



펠리페 5세에게 반기를 들지 않았던


나바라와 바스크 지역은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인정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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