썼을 뿐인데, 그냥 꽤 오랫동안 가슴에서 웅성거리며 떠나지 않던 이 짧은 문장을 그냥 썼을 뿐인데, 인적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외딴곳에 떨어진 기분이 든다.
나무 한 그루도 없고 풀 한 포기 소생 기미도 없는 휑하고 냉기 성성한 세상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나일 수도 있고, 당신일 수도 있다. 아니 ‘우리’라는 게 더 맞을 수도 있겠다.
우는 사람, 울어줄 사람이 없는 장례식장! 울지 않으니 떠난 이의 영정과, 검은색 상복을 입고 서서, 오는 사람들을 맞아주는 몇 사람만 없으면, 여기가 장례식장인지 친척과 지인들이 모인 회합 장소인지 구분조차도 모호한 곳!
아무도 울지 않는 곳! 솟구치는 눈물을 참느라 충혈된 눈자위를 가진 사람조차도 찾아보기 힘든 곳! 그들이 입고 있는 상복만 아니면 누가 상주이고 누가 조문객인지 구분이 힘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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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다. 부고(訃告)를 들으면, 듣는 순간 상주의 슬픔이 짐작되어 조문을 나서기도 전부터 어떻게 위로하고, 떠난 이에게 어떤 덕담으로 조문객으로서의 예의를 다해야 할까를 생각하고 고민한다.
어머니를 잃은 내 처지와 내 아픔이 그대로 살아나, 가까운 사람은 물론이고, 이름과 관계조차도 가물가물한 먼 친척과, 고인이 한 번도 뵌 적 없는 지인의 부모, 혹은 배우자나 형제자매라도 저절로 눈물부터 터졌다. 핏줄로 이어진 혈육을 보내는 사람의 마음을 무조건 나와 같을 거라고 믿기부터 했다.
혈육을 잃은 슬픔은 무뎌지는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른다고 아픔이 가벼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볼 수 없다고 그리움이 옅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은 그 어떤 것으로도 옅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도 틀린 말이었고, 살다 보면 받아들여지겠지 했던 이성적인 논리도 비켜갔다. 그런데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살아졌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아마 이건 내가 세상 뜰 때까지도 모를 일일 것이다. ‘엄마’ 하고 부를 때마다 경기하듯이 솟구치는 그리움만 더 확실해지고, 사지를 오그라들게 하는 아픈 마음만 더 사실이 될 뿐이니 말이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장례식장으로 들어서면서 마음은 이미 울컥거렸고, 나를 맞아주는 상주와 눈을 마주친 순간엔 내가 먼저 눈물이 나와 준비해 간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잠시 머물다 돌아오는 길은 거의 전부라고 할 만큼 마음도, 눈물도, 갖고 있던 체온마저도, 급속도로 마르고 차가워졌다. 울지 않는 상주를 보는 일은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낯설었고, 어이없었으며, 분노마저 치밀었다. 저러고도 자식인가. 저렇게 미세한 동요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형제를, 자매를 보낼 수 있는가. 같은 색깔 같은 온도를 가진 피가 흐르는 혈육이라고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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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한 마음이야 없겠니? 안 운다고 남편이, 아버지가 죽었는데 안 슬플까? 시대가 애도의 모습까지 변하게 한 거지. 얘, 우리 자식들은 울어줄 것 같니? 아마 걔들은 지금보다 더 안 울걸? 삼일장도 사라질지 몰라. 가족의 상을 치르려면 삼우까지 오일 이상을 묶여 있어야 하는데, 요즘처럼 각박하게 돌아가는 세상에 슬픔에만 빠져 있을 수 있겠냐고. 간 사람은 간 사람이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살아갈’ 일이 또 앞에 있으니까. 벌써 가족이 임종하면 바로 다음 날 장례 치르는 집들도 있더라.”
그 ‘살아갈’ 세상에 그 사람이 이젠 없는데, ‘살아갈 일’ 때문에, ‘그 사람이 없는’ 것에 단 며칠도 슬퍼할 겨를이 없는 세상이라고? 무연고자도 아니고 가족이 있는데 하루 만에 장례 치르는 집? 무서웠다. 말문이 막히고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갔다.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면 그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차올랐다.
“나도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별로 울지 않았어. 이월이었잖아? 제대 후 복학하는 큰애와 그해 대학 신입생이 되는 둘째 등록금 걱정으로, 조의금이라도 많이 들어와 형제들이 얼마씩이라도 나눠가질 수 있었으면... 그 생각을 더 많이 했어. 그러고 있으니 죽은 아버지 얼굴보다 등록금 고지서가 더 떠오르는 거야. 나쁜 년이라고 자책도 했지만 그게 산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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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척 오빠의 장례식장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그의 부인과 일남이녀의 자식들을 보고 절망한 모습으로 장례식장을 나오는 나에게, 동행했던 친척 언니가 먼저 눈치채고 말을 이었다.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야 일박이일을 해도 모자랐지만 그래서 더욱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요즘 어느 장례식장에서도 곡은 들리지 않더라. 그래 서겠지? 너, 엄마 돌아가셨을 때 네 모습 말이야. 칠십 년 대 드라마 주인공 보는 것 같았어. 어쩌면 그렇게 하염없이 우니? 물론 넌 형제가 없으니까 형제 득실한 우리들과는 슬픔의 차이가 있겠지만, 하도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본 상주 울음이라 신기하기까지 하더라니까? 그러면서 네가 사는 데는 별 문제없다는 게 짐작되더라. 누군들 슬퍼만 하고 싶지 않겠니? 가족이 죽었는데. 사는 게 팍팍하니 슬픔도 뒷전인 거지.”
친척 언니의 눈물이 사라진 장례식장에 대한 변호는 분명 설득력이 있었다. 나의 울음을 사는 데 별 문제없다고 짐작했다는 것엔 쓰고 허탈한 한숨이 나왔지만, 현실의 무게를 울지 못하는 이유로 내세울 때는 이론적으로는 이해도 가능했다. 하지만 눈물이, 그렇게 분별 가능한 것일까? 가족과의 사별이 무엇에 밀려 후순위가 될 수 있는 슬픔인가?
억지로 양보해도 그렇다.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상주를 포함해 조문객들이 상갓집에서 우는 건, 고인에 대한 애도나 상주의 슬픔을 나누기 위한 것보다는, 제각각 자기 설움에 겨워 우는 거라고. 울고 싶은데 울어도 되는 멍석을 깔아놓은 상갓집이야말로, 각자 울고 싶은 이유로 눈물 쏟아내도 되는, 고인이 주고 가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그런데도 울지 않고, 울지 못하는 사람들... 나는 말 안 하기로 작심한 사람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 자식들을 포함해서 이젠 부모 죽는다고 곡하며 슬피 울 자식들은 사라졌어. 요즘 애들 얼마나 똑똑하고 영악하니? 그리고 걔들이 살아갈 세상은 우리보다 더 각박할 테고. 오죽하면 그런 조사 결과가 나왔겠니? 부모 나이가 언제 돌아가시는 게 적당하냐고 묻는 질문에 육십삼 세라고 답한 게 압도적이었다는 거. 왜 육십삼 세냐고 다시 물었더니, 낳아서 키워주고 대학까지 공부시켜 주고, 결혼까지 시켜준 다음엔 부모 역할이 끝난다는 거야. 그러니 부담 주지 말고 돌아가시라는 거지. 얘, 그 말 듣는데 억장이 무너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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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내외의 삶이 안녕과 평화와 행복으로 이어지길 비는 마음이 그 안에 있다. 슬플 때 마음껏 울 수 있도록, 아들 내외에게 울음을 가로막는 세상살이의 고난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 안에 있다. 나의 죽음이 아들 내외에게는 그 어떤 이유로도 뒷전으로 밀리지 않도록, 여한 없이 사랑한 부모와 자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 안에 있다. 그런 삶이 가족 모두에게 주어져 내가 떠날 때는 이별이 진정 아름답고 슬플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 안에 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한 청원, 이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다. 내가 세상 뜰 때까지 세상 그 누구에게도 짐이나 부담, 근심거리가 되지 않게 건강과 물질적 자립으로, 나의 자존을 지켜달라는 간절함... 이건 정말 사람의 의지만으론 되지 않는 일이라 기도하는 손에 더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애틋한 몇몇 인연들... 그들을 더 많이 사랑해 주고, 더 많이 기도해 주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의지도 그 안에 있다. 내가 없는 세상이라도 그들이 아프거나 외로울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죽어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죽어서 더 마음껏 찾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우리가 동행했던 시간이 귀한 축복으로 간직될 수 있도록... 나는 오늘도 기도한다.
사랑을 다짐하고, 노력을 다짐하고, 순종과 희생을 다짐한다. 모든 기도는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되도록 해 달라는 청원 속엔, 그렇게 될 수 있게 내가 더 노력할 수 있도록 지켜주고, 도와주고, 이끌어달라는 그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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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에서 슬피 우는 사람이 그리운 시절이다. 고인과의 사무친 정 때문이든, 상주의 피가 마르는 상실감 때문이든, 그도 저도 아니면 자신의 처지에 대한 막막함 때문이든,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슬픈 얼굴들이 그리운 시절이다.
있는가! 당신 죽어 세상 뜰 때 울어줄 사람!
있는가! 마음의 온도 낮추지 않고 당신, 오래 기억해 줄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