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보았다.
목련, 개나리, 아카시아, 탱탱하게 부푼 나뭇잎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던 날이었고 그래서 대낮인데도 하늘은 눅눅한 이불보다도 더 무겁게 내려앉아 있던 날이었다.
세상은 돌아선 연인들의 등처럼 캄캄했고 적요했고 텅 빈 듯했다. 어떤 감정도 일어나지 않는 조용한 날이었다. 가고 있는 시간도 오고 있는 시간도 느껴지지 않는 홀로 서 있는 십 차선 횡단보도 앞처럼 그냥 어딘가에 붙박힌 것 같던 날이었다.
©픽사베이
30촉짜리 백열등 수만 개가 한꺼번에 점화되듯 꽃들이 피어나 있었다. 한 번도 거짓을 말하거나 남 탓해보지 않은 어린아이 입술처럼 맑고 깨끗하고 부드러운 생명.
그 환하고 아찔한 발견의 순간에 때마침 후드득, 한 계절을 미리 당겨 온 듯한 소나기가 내렸다. 아파트 앞 뒤 동이 빗줄기에 가려 긴 직사각형 실루엣으로 흐려져 갔다. 그 사이를 신생아의 젖 냄새 같은 꽃향기가 백 가지 색깔로 번져가고 있었다.
봄 소나기에 젖는 세상에서 “또”라는 외마디 부사어가 하루 종일 온몸의 핏줄을 타고 돌아다녔다. 뒤로 한참이나 다음 말이 빗줄기에 젖은 땅 속에서 맴돌았다. 날숨이 내쉬어지지 않는 시간, 내 집 거실 창 앞에서 나는 그날 “또”라는 단어를 들숨과 함께 거듭거듭 들이키고서야 다음 말을 토할 수 있었다. 비로소 깊게 날숨이 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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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번도 훌쩍 넘게 보아 온 세상의 사계가 왜 그렇게 충격의 맞닥뜨림으로 내게 왔을까? 피고 지고 다시 피는 게 꽃의 순환성이고, 물오르고 말라가다 다시 숨을 일으키는 게 나무의 질서이며, 그것이 세상의 무한한 영속성인데 나는 왜 놀랐을까?
그것은 재생과 순환의 의미를 무한대로 가진 “또”라는 단음절 때문이었다. 늘 써 온 단어였지만, 한 번도 주제어가 되어 보지 못한 채 상황을 강조하거나 거듭되는 상황을 나타낼 때 그냥 습관처럼 내뱉어지던 단어.
그런데 그날, 하늘은 캄캄하고 비는 내리는데, 발바닥부터 서서히 그리고 저릿하게 치밀어 오르던 무엇, 그것은 감사와 감동과 바로 뒤를 잇던 깊은 슬픔이었다.
“또”를 말할 수 있다는 건 살아 있다는 증거였고, 다시 보이고 느껴지는 모든 상황 속에 내가 속해 있다는 현실감이었다. 되풀이되는 상황 안에 내 삶 또한 되풀이되고 있음을 나는 그날 그 짧은 “또”를 거푸 발음하며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세상 속에서의 어머니의 부재가 한꺼번에 깨달아졌다. 사지에 물주머니를 찬 것처럼 온몸이 출렁거렸다.
“또”를 말할 수 없는 세상 저편으로 훌쩍 건너가 버린 어머니...
‘생명’ 이린 단어가 떠올랐다.
생명! 生命! 그것은 ‘살아 있으라는 명령’이라던 어느 소설가의 글이 바로 지금 읽은 것처럼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살아 있으니까 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살아 있으니까 어제 보았던 것을 또, 볼 수 있는 것이다.
살아 있으니까 어제 겪었던 것을 또, 겪게 되는 것이다.
아직 살아 있어야 하는 명령이 거두어지지 않은 이 시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얼마나 감사한가.
어머니 돌아가시고 세 번째 어버이날이 다가오고 있다.
또, 카네이션을 사서 또, 가슴에 꽂아드리며 일 년에 한 번이라도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때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셨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버이의 은혜는 가이없어라...’ <어버이 날> 노래 가사를 기억에서 호출할 어머니가 이제는 세상에 없다.
좌우 사방 세상 모든 것이 또, 또, 또... 되풀이되며 이어지는데...
벌써 또, 해가 비친다
언젠가 내 아들도 “또”라는 외마디 단어를 붙들고 부모 없는 어버이날이 지나가고 있는 즈음에 또, 꽃을 보리라. 또, 잎을 보리라. 또, 그렇게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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