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일생에서 그가 기억하는 날짜, 기억해야 하는 날짜는 몇 개 정도일까? 그리고 그 날짜는 어떤 의미, 어떤 시간으로 오고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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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얻어지는 365일, 1월부터 12월까지 삼백육십 다섯 개의 날짜가 들어찬 달력을 펼쳐본다.
별표를 하고 별표의 의미를 적고, 평상시완 분명히 다른 마음으로 기억을 환기시키는 그런 날짜들이 보인다.
대부분이 기쁘고 환영해야 할 날짜들이다. 가족의 생일과 결혼기념일, 특히 작년 시월에 아들이 결혼해 분가한 후론, 며느리의 생일도 구월의 아주 행복한 일정이 되어 예쁜 별 모양으로 빛나고 있다. 당연히 아이들이 보내오는 신혼의 알콩달콩한 이야기들, 전화로 듣거나 집에 와서 들려준 이야기들도 우리 집 달력에선 맑은 날 한밤중 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며 돋아난다.
며느리가 처음으로 순두부찌개를 만들어 아들이 맛있게 먹는 사진을 보내온 날, 두 아이가 마트에서 장보는 사진을 보내온 날, 아들 내외와 영상통화를 한 날, 아들의 후진 주차 장면을 동영상으로 보내온 날... 아카시아가 흐드러진 석촌호수에서 아들 내외의 행복한 데이트 장면을 사진으로 본 날...
별 희한한 것도 다 기념일이라며 별표를 치고 챙긴다는 주변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내겐 새로 받은 일 년이란 시간 속에서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행복한 날짜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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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달력을 넘기다 8월에서 숨이 딱, 멈춰지는 날짜와 마주쳤다. 삼 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기일 앞에서였다.
어쩌면 지난 주말에 집에 온 아들 내외와 함께 본 영화 <생일>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세월호에서 자녀를 잃은 부모의 아픔과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노력이 자식을 가진 입장에서 거의 오차 범위 없이 전달되어 많이 울고 본 영화였다.
죽은 아들의 생일잔치라니!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설정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잔치에 초대된 아들의 친구들과 이웃들로부터 갖가지 아들과의 에피소드를 나누는 동안 극 중 부모보다 내가 먼저 위로를 받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상실의 아픔은 ‘있었던’ 사람을, 그리고 그 사람이 ‘살았던’ 시간을, 기억해주고 간직해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낄 때, 더 커지는 법이다. 그래서 나라도 더 오래, 더 생생하게, 보듬어줘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마음이, 유족에겐 필수불가결의 의무가 되어 함께 한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어머니의 부재에만 함몰된 시간을 사느라, 어머니가 계셨던 시간까지 슬픔으로 덮어 누르고 있었다는 자각이 온 머리를 덮쳤다. 허겁지겁 달력을 넘기고 젖혀본다. 역시... 없다! 음력 6월 12일, 양력으로 7월이면 늘 있었던 어머니의 생신 날짜가 어느 사이 달력에서 사라졌다.
대신 어머니가 살아계실 땐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던 생면부지의 날짜가 ‘어머니 기일’이란 이름으로 내 눈앞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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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어머니라는 말만 들으면 가슴이 밀물처럼 들어차는 울음에 두 발을 동동거리다가 고꾸라져 우는데, 그런 나를 아는 지인들로부터 이제는 그만 어머니를 보내드려야 한다는 위로와 조언을 받을 때마다 불 같이 분노하며 귀를 막았는데, 그런 내가, 어머니의 생일을 지웠다니! 생일 대신 기일을 어머니를 기념하는 날로 대체하고 있었다니!
그것은 어머니 돌아가신 이후 처음으로 맞닥뜨린 충격이었다.
왜, 당연한 듯 어머니 생일을 잊었을까? 이제 세상에 안 계시니 잊어도 되는 날이라고 생각했을까? 죽음은 그런 것인가. 사는 동안 귀했던 모든 일정과 사연이 멈춘 자리에, 죽은 자는 기억할 수 없는 새로운 날짜 하나 덩그러니 들어앉는 어색한 조우 같은 것인가!
기일은 떠난 자의 날짜가 아니다. 남은 자들의 날짜다. 상실을 재확인하게 하고, 후회도 자책, 그리움까지 남은 자들만의 몫이 된다. 그러나 생일은 다르다. 떠난 이와 동행했던 시간의 발자취가 추억으로 공유되고 ‘함께 한’ 날들을 다시 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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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어머니의 생신 땐 어머니를 아는 분들께 전화를 드려야겠다. 영화 <생일>의 부모처럼, 내 어머니를 기억하는 사람들로 하여 어쩌면, 어쩌면 나도 웃을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