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정거장엔 배차 시간표가 없다- 사람 47
사람 47
혼자 살아온 할아버지였다. 결혼을 했지만 아내는 둘째 아들을 낳은 후 산후풍으로 죽었다. 삼십 대 초반에 그는 홀아비가 되었다. 홀로 열심히 키운 한 살 터울의 두 아들은 군 복무를 카츄사에서 나란히 했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제대 후 나란히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아들들은 미국에서 결혼을 했다. 큰아들은 한국 여자와 결혼했으나 작은 아들은 스페인 여자와 결혼했다. 아들들은 효자였다. 처음에 이민 갈 때도 아버지를 모시고 가려고 형제가 정말 있는 노력 없는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영복 할아버지는 요지부동이었다.
“젊어서도 아니고 늙어 자기 나라를 어떻게 떠나요? 늙으면 이사도 가기 힘든데 이민을 가재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김영복 어르신, 팔십이 세, 칠 년 전부터 파킨슨으로 고생하다 본인의 의지로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모셔가려고 두 아들이 번갈아 한국으로 나와 애원하다시피 이민을 권유했다. 그러나 병까지 얻은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더 불가능한 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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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가 저만치 보이는데,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도 있잖아? 내 나라를 어떻게 떠나 길짐승처럼 남의 나라에서 죽어요? 남의 나라에서 살다가도 죽을 때가 되면 태어난 조국 찾는 게 마땅하지.”
그래서 자식들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 주려고 요양병원으로 들어왔다며 영복 어르신은 웃었다. 어깨며 팔이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떨렸다.
“이런 몸으로는 더더욱 못 가지. 내 나라에서 이런 꼴 보이는 것도 싫은데, 내가 왜 멀쩡한 나라 두고 남의 나라 가서, 색깔도 모양도 말도 다른 남의 나라 사람들한테 이 꼴 보이며 살아? 아들놈들이랑 겨우 타협한 게 이거야. 그럼 병원으로라도 들어가시라, 이제 혼자 있는 건 절대 안 된다, 하며 날 윽박지르는 거야. 그래서 입원했어요.”
파킨슨을 이미 칠 년이라는 기간을 앓아 온 영복 어르신은 보행이 자유롭지 않았다. 두 다리의 균형이 유지되지 못해 넘어지기 일쑤였고, 얼굴 근육도 경직되어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때도 많았다.
“내가 흉측하죠? 말해 뭐해? 내가 거울을 봐도 내 표정이 낯선데. 파킨슨이 떠는 병인 줄로만 알았는데, 표정까지 이렇게 넋 나가게 할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내가 죽었다는 연락받더라도 오지 말라고 했어. 그랬더니 아들놈들이 펄쩍 뛰더라고. 누구 삼대까지 소문날 불효자 만들려고 그러냐며, 지들도 늙어가는 게 울기까지 하더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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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죠. 아드님들이 효자네요. 그 먼 미국에서 둘이 번갈아 육 개월에 한 번 씩은 꼭 아버지 뵈러 들어오는 거 봐요. 절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에요.”
입원하던 날 어색해하는 영복 어르신을 살뜰히 챙기며 도와준 민자 요양보호사가 대꾸했다. 두 사람은 어느새 가장 친한 친구 사이처럼 오며 가며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자식 놈들은 큰 놈은 처가가 있는 광주에, 하나 있는 딸은 남편 직장이 있는 평택에, 장가 안 간 막내는 친구랑 찻집인가 뭔가 한다고 파주에 사는데, 저는 자식들 일 년에 딱 두 번 명절에나 봐요. 생일? 어버이날? 당연히 전화 한 통화로 땡이죠. 그것도 목소리 듣는 전화도 아니에요. 왜 있잖아요. 요란하게 그림 같은 걸로 축하 축하하며 보내는 카톡이요. 그 먼 미국에서도 일 년이면 두 번은 꼭 나와, 아버지를 보러 오는 어르신 자식들은 만고에 효자들이라고요.”
민자 요양보호사는 말끝에 한숨을 땅 꺼지듯이 쉬었다. 그 한숨을 영복 어르신이 혀 차는 소리로 받는다.
“그래도 보호사님 자식들은 같은 한국에 사니 무슨 일이 있으면 당일로 올 거 아니요? 우리 자식들은 나 죽었다는 연락을 받아도, 이미 내 몸이 차갑게 식어야 도착할 거란 말이오. 그게 서럽지요. 평소에 몇 번 보냐가 뭐 그리 중요해? 어차피 두 발 달린 짐승 저 갈 데로 갔고, 지 가정 꾸려 제 짝, 제 자식들까지 있는 어른들인데... 사실 나는 여기 들어오기 전 혼자 있을 때, 아무것도 겁나지 않는데 이거 딱 한 가지가 겁납디다.”
“혼자 돌아가실까 봐서요?”
그 말을 하는 민자 요양보호사의 눈가가 붉어졌다.
“아니야.”
“그럼 보고 싶은 자식들 못 보고 갑자기 돌아가시게 될까 봐요?”
“그건 운명이니 어쩔 수 없지 않소. 자기가 갈 시간 미리 알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두 사람 사이에 잠시 공백이 흐른다.
“아유, 어르신. 물병 거둬 새로 채우려고 들어왔다가 또 신세한탄을 했네요. 어르신이 겁났다는 그 딱 한 가지는 다음에 들을게요.”
민자 요양보호사가 병실에서 시간이 지체된 것이 떠올랐는지 병실 침대를 돌며 물병을 모아 나가며 말했다. 그때였다. 힘든 상황을 설명해야 할 때마다 눈과 입이 더 일그러지며 온몸을 떠는 영복 어르신이 온 힘을 모아 말했다.
“혼자 죽었는데, 아무도 그걸 모를까 봐... 며칠이 지나도 아무도 모른 채 내가 상해갈까 봐... 그게 겁났어요. 그래서 신문에 나고 뉴스에 나올까 봐... 우리 자식들 가슴에 빼내지 못할 못을 박게 될 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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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자 요양보호사가 돌아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은 듯 걸음을 멈췄다.
“그런데 여기... 요양병원에서는 그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으니... 잘 들어왔어. 그지?”
민자 요양보호사가 킁킁거리며 목을 가다듬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저는 또 뭐라고. 어르신, 어르신은 절대 신문에 나고 뉴스에 나오는 스타는 못 돼요. 더욱이 우리 병원에 오셨으니 더더욱 그럴 일은 없고요. 여긴 밤에도 당직 의사가 계시죠. 이십사 시간 간호부 선생님들이랑 저희 요양부가 근무하죠. 이제 그런 걱정일랑 딱, 끊어버리세요.”
“그러게. 병든 노인네들에겐, 더욱이 배우자도 없고 자식들이 멀리 있는 노인네들에겐, 그게 가장 걱정이야. 오늘 아침에 내가 뭐했는지 알아요? 우리 동네에 나처럼 혼자 사는 친구한테 전화했어. 어디 특별히 병난 데는 아직 없는 노인네지만 나이가 팔십이 넘었으니 황천길 예약은 이미 끝났고, 그래서 집 팔아서 자식들한테 조금씩 나눠주고 요양병원에 들어오라고.”
“그러니 뭐라세요?”
“말은 했지만 펄쩍 뛸 줄 알았는데, 그럴 참이라고 하더라고. 혼자 죽는 건 괜찮은데 아무도 몰라서 흉측한 꼴 세상에 보일까 봐 겁난다면서 말이야.”
“어디 어르신들만 그런 걱정 하겠어요? 저도, 다른 사람들도, 늙어가니까 배우자가 있든 없든, 다 그런 생각들을 해요. 오죽하면 늙도록 일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런 말 하겠어요? 나중에 요양병원 갈 돈 모으려고 한다고 말이에요. 내가 가진 돈이 있어야 내 몸도 불쌍하지 않게 거둘 수 있는 세상이니까, 한집에서 이대 삼대가 살았던 세상은 이미 전설이 됐잖아요.”
우연이었다. 그날 그 시간에 내가 영복 어르신 병실에 머물렀던 것은! 그래서 두 사람의 속말을 듣게 된 것은!
그날 오전에 폭력성에 환각과 환청까지 있는 심한 치매 환자가 영복 어르신이 있는 병실로 입원했다. 입원하면 바로 신체 계측과 바이탈을 측정해야 하는데 워낙 강하게 거부하는 바람에 도저히 진행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 그때서야 겨우 진정돼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쉽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체온을 재려면 고개를 흔들어대고, 혈압기 퍼프에 압력이 올라가면, 다른 손으로 쥐어뜯고, 신장을 재려고 몸을 바로 누이면 발로 차는 것도 부족해 벌떡벌떡 일어서는 통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그래서 듣게 되었다. 가슴이 먹먹하고 아파왔다.
요양병원에 간호조무사로 근무하면서 가슴이 안 먹먹하고 안 아플 때는 사실 없었다. 늙은 사람, 병든 사람, 늙고 병든 사람. 죽은 사람, 죽어가는 사람, 죽지는 않았는데 죽은 것 같은 사람. 가족이 많은 사람, 가족이 없는 사람, 가족이 많은데도 늘 혼자인 사람, 가족이 없어서 눈길이 더 가는 사람... 이런 환자들을 보며 평상심으로 못 산지도 근무 날짜 수만큼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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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 시대란 번쩍이는 플래카드가 세상에 나부낀 지도 벌써 여러 해다. 육십은 어린애, 칠십은 소년, 팔십은 청년...이라는 말도 안 되는 괴변이 플래카드와 함께 펄럭이며 세상을 홀린 지도 꼭 그만큼 됐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안다. 그 플래카드 뒷면은 누더기로 기워져 있다는 걸 말이다. 고독사, 노년 우울증으로 인한 노인 자살 인구 급증, 유병 삼십 년...
처음으로 우리 병원에 입원해 계신 많은 어르신들이 가엽지 않은 날이었다. 처음으로 요양병원에서 떠나보낸 어머니에게 죄스런 마음이 조금은 옅어지던 날이었다.
아니다.
처음으로 여기 어르신들, 우리 엄마가 복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 날이었다. 그래서... 진짜 슬펐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