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FP가 대학원을 가면 벌어지는 일
젊은 기운이 넘쳐나고 쾌활한 대학 캠퍼스에서 시험기간도 아닌데 가방도 없이 비루한 옷차림으로 좀비처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높은 확률로 대학원생일 것이라는 말이 있다. '대학원생'을 검색하면 유명한 짤방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모두 측은한 이야기들 뿐이다. 오늘은 교육은 교육이지만 내가 받고 있는 대학원 교육에 대해 살짝쿵 얘기해볼까 한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대학원 왜 갔냐는 말이었다. 물론 그 말에는 '취업 준비하기 싫어서?'라는 뉘앙스가 따라붙기 마련이었다. 나는 사실 대기업 취업에는 뜻이 없었다. 그럼 내 뜻은 어디에 있는가를 찾던 중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이들과 소통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떠올렸고, 이 경험과 학부 때의 전공이었던 문화콘텐츠를 살려 '교육공학'을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내가 대학원에 온 이유는 다른 대학원생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어서라고 대답하곤 했다.
물론 대학원이 쉬운 선택도 아니었고, 운 좋게 합격 후 공부하는 과정 또한 모두 고된 여정임은 확실하다. 그렇지만 대학원 선택 전으로 다시 돌아간대도 나는 또다시 대학원을 선택하리라 장담한다. 그런데 한 가지 후회되는 점은 대학원을 너무 얕봤다는 것. 내가 생각했던 희망과 내가 마주했던 현실은 괴리가 상당했다. 2~3학기 때부터 느껴는 왔지만 4학기를 마치고 나서야 명확하게 '대학원은 무엇인가'에 대해 정리한 것들을 몇 가지 소개한다.
대학원은 공부(만)하러 가는 곳이다.
누군가 나에게 대학원은 도대체 뭘 하러 가는 곳이냐고 물어본다면 이제는 이렇게 대답한다. 가장 본질적인 '공부'에만 마음껏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라고. 그런데 이렇게 공부만 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에게 현실은 조금 가혹하다. 대학원생 생활을 온전히 잘 해내려면 낮에는 조교, 밤에는 알바(특히 과외) 등을 하면서 생활비도 벌고 등록금도 충당할 수 있도록 멀티플레이가 가능해야 한다. 그런데 교수님들은 그 사실을 조금은... 잊고 계신 듯하다. 한 교수님의 말씀이 굉장히 놀라웠는데, "대학원은 공부만 하러 오는 곳이다. 생활비가 고달프다면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 공부 말고."라고 말씀하셨던 분이 계신다. 너무 단호히 말씀하셔서 뜨끔했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생, 현재까지 MBTI 검사를 하면 ENFP가 나오는 천부적인 캠페이너(인간 골든리트리버)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본업 외에도 여러 가지 사이드 프로젝트들을 벌려놓고 수면시간이 모자라게 쓰리잡, 포잡을 해내며 내 주변 누구보다도 높은 활동력을 가진 나였는데, 일하지 말고, 수입을 추구하지 말고, 학교에 매일 나와서 앉아서 공부만 하라니.. 재수학원에서 공부했던 때보다 더 고역이었다.
여기서 감히 반감이 들었다.(물론 마음속으로만...;;;) "교수님 그럼 커리어는요? 제 재정 상황은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제 일은요? 이걸 다 포기하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런데 그 교수님뿐만 아니라 지도 교수님과 다른 교수님, 주변 박사 선생님들과 졸업한 선배님들한테 다 물어봐도 대답은 똑같았다. "원래 그런 거야."
대학원은 원래 그런 곳이다.
대학원을 와서 가장 억울했던 것 중 하나는,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내가 배우고 싶은 방식으로 배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 중 낮에는 조교일을 해야 하는 것도 포함되었는데, 조교 업무를 하면서 교수님의 강의 보조나 행정처리, 시설관리를 하고 있자니 내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이건 솔직히 조금 개인 편차가 큰 부분인 것 같다. 1학기 정도 조교 업무를 해보니 내 시간이 공부에 쓰이는 것이 아닌, 다른 심부름들에 쓰이는 것이 억울하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이러면서 일도 못하게 하고 돈은 당연히 못 벌고 못 모으고, 사회적으로는 성인이라 이래저래 돈 나갈 곳은 많고... 백 번 양보해서 대학원이 그런 곳이라고 치자. 그럼 내가 배우고 싶은 과목을 내가 배우고 싶은 방식으로 배울 수 있도록 과목 운영이 효과적으로 되는가? 전혀. 교수님이 열어주시는 과목에 맞춰 들어야 하기 때문에 나의 인생 계획 같은 것은 없다. 일단 '졸업'만 바라보게 된다. 졸업만을 목표하게 되니 이 모든 것을 참고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억울함이 스멀스멀 기어오를만하면 주변 석박사 선생님들이나 교수님들이 꼭 한 마디 하신다. "대학원은 원래 그런 곳이야. 이거 참아야 졸업하지."
그런데 나는 이게 이상하다. 내가 전공하는 과목이 교육을 배우는 학문이고, 교육을 가장 효율적으로 설계하는 학문인데 과연 내가 지금 몸 담고 있는 이 고등교육기관에서는 개인에게 효율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나?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라고 하기에는 나의 2년이 너무 아깝고, 맞다고 하기에는 나도 자신이 없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이 모든 과정을 참고 견뎌서 졸업한 선배들을 보더라도 본인들의 연구가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가 아닌, 교수님에게 지도받다 보니 수정된 연구였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는 '교육의 미래'에 대한 공부였는데, 논문학기인 4학기까지 내가 들은 수업은 '이론 중심' 수업이 많았다. 4학기 내내 같은 이론들을 개관하고, 그 이론에서 파생된 새로운 연구를 개관하고, 특정 이론을 활용해서 내가 직접 설계해보는 수업들을 쭈욱 듣다 보니 의문점이 생긴 것이 있었다. "이론이랑 실재가 과연 같을까?" 이론 중심으로 교육에 대해 논하고 있자니 실제 교육환경에서 학습자나 교수자의 목소리는 무시되기 일쑤이고, 이론 중심으로 교육을 바라보자니 수업을 창의적인 방식으로 설계해보고 싶다는 나의 아이디어들이 죽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지도 교수님은 부쩍 바빠지셔서 전공생들에게 직접적인 지도를 해주지 못하셨지만, 전공생이 365일 학교에 나와서 교수님 눈에 안 보일 때에도 공부를 하고 있길 바라셨다.(그래야 연구자로서의 교수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며 자연스레 '도제'된다고 강조하셨으므로..) 지도를 해주시면 영어 번역과 단어 사용에 대한 지도가 대다수였고, 지도가 어려우실 때에는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기를 바라셨다. 선배도 없는 환경에서 동기들끼리 모여 서로 눈치 보며 집단 학습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내가 너무나도 원했던 프로젝트성 연구나 학술회의/세미나 참석 등은 자연스레 '쓸 데 없는 일'로 치부되었고, 전공생들끼리의 스터디 모임으로 만족해야 했었다.
물론 나의 ENFP적인 성향과 넘쳐나는 활동성 때문에 더욱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지만, 대학원을 4학기 다녀보니 결론이 났다. 내가 생각하는 교육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는 올바른 교육이 무엇인지 학생들에게, 학부모에게, 또 브런치에서 잘난 듯 떠들고 있지만 막상 나 자신은 그런 교육과 거리가 먼 교육기관에서 '존버'해가며 버틴다는 것이 조금 많이 아이러니했다. 그래서 나는 연세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내 주변 사람들은 무슨 이런 폭탄발언을 브런치에서 하냐고 하겠지만, 나는 여전히 내 앞날이 기대된다. 자신 있으므로.
(너무 부정적으로만 얘기하는 것 같아서 조금 찔리니 좋은 이야기도 하자면, 4학기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공부했던 학기는 세미나 형식의 수업들이었다. 이런 수업이 높은 빈도로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매 학기마다 3~4개의 수강 과목 중 만족스러웠던 것은 딱 한 과목씩. 내가 선택했던 세미나 수업들이었다.)